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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핀, 흰독말풀(다투라)의 고백

10월 23일 탄생화

by 가야

달빛 아래 피어난 나, 흰독말풀의 고백


나는 흰독말풀, 학명으로는 Datura stramonium.
달빛이 은은히 내리쬐는 밤이면, 나의 흰 나팔꽃은 더욱 또렷이 빛을 발합니다. 낮의 소란이 잠들고 세상이 고요해질 때, 나의 존재는 비로소 드러나지요. 많은 이들이 내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나의 이름, 다투라의 뿌리


내 이름 다투라(Datura) 는 고대 인도의 언어, 산스크리트어 ‘dhattūra’ 에서 왔습니다.


그 옛날 인도 사람들은 나를 “독성이 강한 나팔 모양의 꽃을 가진 풀” 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힌디어 ‘dhatura’로 전해지고, 훗날 유럽의 식물학자들이 그 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의 학명 속에 새겨 넣었지요.

불경을 외우다 보면 ‘다투라’라는 소리가 낯설지 않다 하지요?


다라니, 다투, 다라… 범어(산스크리트)에는 비슷한 어미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마치 불경 한 구절을 듣는 듯 친근한 울림을 느끼곤 합니다. 내 속의 독이 성스러움과 금기의 경계를 아슬히 넘나드는 것처럼, 내 이름 또한 신성한 언어의 여운을 머금고 있습니다.

전해 내려온 전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금기와 신비를 함께 품어왔습니다.


먼저 인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Shiva) 가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독을 삼켰을 때, 목이 푸르게 변하며 뜨거운 열에 시달렸다고 하지요. 그때 신에게 바쳐진 것이 바로 나, 다투라의 꽃이었습니다. 내 차가운 기운이 시바의 뜨거움을 식혔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인도의 사원에서는 시바를 위한 제물로 내 꽃을 바치는 의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남미 원주민들은 나를 ‘꿈의 문을 여는 식물’ 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바호와 주니족의 샤먼들은 제의를 올릴 때, 내 잎과 씨앗을 태우거나 달여 마시며 신과 교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무당만이 다룰 수 있는 금기의 풀, 그것이 바로 나였습니다.

중세 유럽의 전설도 빠질 수 없습니다. 마녀들이 하늘을 나는 듯한 환각을 얻기 위해 내 잎과 씨앗으로 만든 연고를 몸에 바르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마녀의 빗자루를 타게 하는 꽃’이라 불렸습니다. 사람들은 내 꽃말을 “위험한 유혹” 이라 부르며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932년 작품 〈Jimson Weed / White Flower No.1〉

예술 속에서 다시 피어난 나


세월이 흐르고, 예술가들은 나의 양가적인 매력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는 1932년 작품 〈Jimson Weed / White Flower No.1〉 에서 나를 화면 가득 그렸습니다.


순백의 나팔꽃이 크게 확대된 그 그림은, 내 안에 깃든 순수함과 치명적 매혹을 동시에 보여 주었지요. 2014년 이 작품은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는 당시 최고가인 4,400만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나바호와 주니족의 샌드페인팅과 의례용 문양에도 내 모습이 단순화되어 새겨졌습니다. 그들의 작품 속 나는 영혼의 통로,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성한 문양이 되었습니다. 현대의 사진가와 설치미술가들도 흑백의 강렬한 대비 속에서 나를 유혹과 위험의 경계를 상징하는 꽃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나를 닮은 또 다른 존재, 천사의 나팔


많은 이들이 나를 천사의 나팔(Brugmansia) 과 혼동합니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나는 하늘을 향해 곧게 나팔을 울리고, 천사의 나팔은 땅을 향해 고개를 드리웁니다. 나는 한 해만 살고 이듬해 다시 씨앗으로 태어나지만, 천사의 나팔은 나무처럼 오래 사는 다년생이지요.


내 열매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지만, 천사의 나팔 열매는 매끈하고, 나의 줄기는 풀처럼 연하지만 그들의 줄기는 나무처럼 단단합니다. 겉으로는 닮아 있어도 우리 둘은 생김새와 삶의 방식에서 이렇게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달빛의 속삭임


사람들은 내 독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매혹을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순백의 얼굴로 위험을 품은 꽃,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태어난 식물입니다.


밤이 깊어 달빛이 은은히 내려앉으면, 나는 세상의 모든 금기를 향해 조용히 속삭입니다.


“나를 바라보되, 넘어서지 말라.
나의 향기에 취하되, 결코 맛보지 말라.


나의 이름이 곧 경고이며, 동시에 신비이니—
나는 다투라, 흰독말풀.
아름다움과 위험이 공존하는 꽃이다.”


https://youtu.be/ekRrovJFKPQ?si=S68MPFrDXn5X6Y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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