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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러운 신맛 - 수영이야기

10월 26일 탄생화

by 가야



싱그러운 신맛의 풀, 저는 수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영(酸英, Rumex acetosa)이에요.
어쩌면 여러분은 저를 “싱아”라고 부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제목—『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싱아가 사실 저랍니다.

어릴 적 어른들은 종종 저를 “뱀풀”이라고 불렀지요. 제가 뱀을 부르는 것도, 독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단지 제가 자라는 풀숲에 뱀이 숨어 있을까 봐,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않게 하려는 지혜였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무서운 존재가 아니랍니다.

전 세계에서 만나는 나, 수영


저는 한국 들판만의 풀이 아니에요. 유럽 전역, 러시아,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까지, 온대의 습한 들과 냇가라면 어디든 저의 친척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답니다.


영국에서는 “Sorrel(소렐)”, 프랑스에서는 “Oseille(오젤)”, 독일에서는 “Sauerampfer(자우어암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이름에는 ‘신맛’을 뜻하는 어근이 숨어 있답니다. 제 맛이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거지요.

사람들이 나를 즐겨 찾은 이유


봄이 오면 저는 가장 먼저 연둣빛 어린잎을 세상에 내밀어요. 그 새순을 살짝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싱그럽고 상큼한 신맛!


옛날 조선의 어머니들은 저를 봄나물로 무치거나 국을 끓였고, 제 뿌리—‘산모(酸模)’—를 약재로 달여 피를 맑게 하고 입맛을 돋우는 효능을 기대했답니다.

유럽에서도 저는 오랜 친구였어요. 프랑스에서는 수렐 수프(Soupe à l’oseille)라는 이름으로 제 신맛을 그대로 담은 봄철 수프를 끓였고, 러시아 사람들은 그린 보르시(녹색 보르시*에 저를 넣어 겨울 끝자락의 비타민을 보충했지요. 중세 수도원의 허브가든에도 제가 빠지지 않았답니다.

몸에 좋은 점, 그리고 주의할 점


저는 비타민 C, 칼륨, 철분, 사과산과 시트르산이 풍부해 겨우내 부족했던 영양을 채워 주었어요.
하지만 저의 새콤한 맛의 비밀인 수산(oxalic acid)이 너무 많아, 지나치게 많이 드시면 신장결석이나 위 점막 자극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제 어린잎을 적당히, 살짝 데쳐 드시는 것이 가장 좋답니다. ‘적당히’가 저와 오래 좋은 친구로 지내는 비결이지요.

예술 속의 나


저의 잎과 줄기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식물화의 단골 모델이었어요.


18세기 영국의 William Curtis가 그린 《Flora Londinensis》 속 ‘Common Sorrel’ 삽화,

르네상스 시대 유럽 허브북의 세밀화들 속에서 제 붉게 물든 줄기와 창검 같은 잎을 볼 수 있답니다.


문학 속에서는 더 따뜻한 자취를 남겼지요.
박완서 작가님은 저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불러내어 순수했던 시대와 잃어버린 추억을 그리워했습니다. 제 이름이 그 소설 제목 속에서 영원히 빛나게 된 건 제게도 큰 영광이에요.

제가 전하고 싶은 말


“삶의 맛은 달콤함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때로는 새콤하고, 약간은 씁쓸한 기억이 우리를 깊게 만듭니다.


제 잎사귀에 깃든 신맛처럼, 여러분의 하루도 다양한 맛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오늘도 저는 들판 어딘가에서 바람을 타고, 잎 끝에 작은 이슬을 달고 서 있습니다.


싱그럽게 새콤한 제 이야기가 여러분의 가을 하루를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 수영이었습니다.


https://youtu.be/wjWDAFvga3U?si=vDMXZlQm-3Kw6z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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