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의 탄생화
안녕하세요, 저는 서양모과(Medlar, Mespilus germanica)입니다.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제 가지 끝에는 갈색빛 열매가 서리를 기다리며 매달려 있지요. 초겨울 서리를 맞아야만 비로소 제 속살이 달콤해지는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오늘은 저의 긴 여정과, 저를 사랑해 온 사람들의 문화와 예술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저의 고향은 터키(소아시아)·이란 북부·코카서스(Caucasus) 지역입니다. 수천 년 전, 이 비옥한 땅에서 저는 야생으로 자라났습니다.
고대 코카서스 사람들은 저를 “nasp”(나스프) 혹은 “nesper”(네스페르)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름은 후에 페르시아어 “mespil”(메스필)로 이어졌고, 다시 라틴어 “mespila”를 거쳐 오늘의 학명 Mespilus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오가며 저의 열매를 맛보고 재배를 시작하면서, 저는 무역로를 따라 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 제국의 상인과 병사들이 묘목을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 심자, 저는 이탈리아·프랑스·독일·영국의 정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지요.
저를 부르는 이름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영어: Medlar(메들러)
프랑스어: Néflier(네플리에)
이탈리아어: Nespolo(네스폴로)
독일어: Mispel(미스펠)
모두가 고대 페르시아·코카서스에서 유래한 “mespil” 계통의 발음을 이어받은 것이랍니다.
이처럼 제 이름 속에는 수천 년을 거친 언어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저는 낙엽성 작은 교목, 보통 3~6m까지 자랍니다. 가지는 둥글게 퍼져 단정한 수형을 이루고, 회갈색의 껍질은 세월이 지나며 비늘처럼 갈라집니다. 타원형 잎은 여름 내내 짙은 녹색을 띠다가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며, 잎이 모두 떨어진 뒤에도 제 열매는 가지 끝에 오래 남아 늦가을 풍경을 깊게 물들이지요.
5~6월, 신록이 한창일 때 저는 배꽃을 닮은 흰색 혹은 옅은 분홍빛의 오각형 꽃을 가지 끝마다 피워 올립니다. 지름 4~5cm의 꽃이 지고 나면, 별 모양의 꽃받침이 그대로 남아 갈색 열매를 감싸며 자라납니다.
가을이 깊어 10월 무렵 열매가 익어도 처음에는 단단하고 떫어 바로 먹을 수 없습니다. 초겨울 첫 서리를 맞아야 블레팅(bletting)이라는 자연 숙성이 진행되어 과육이 말랑하고 달콤해집니다. 그제야 비로소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잼이나 디저트로 즐기기에 알맞은 진짜 맛이 완성됩니다.
유럽의 사람들은 제 느린 숙성을 보며 “기다림이 주는 달콤함”을 배웠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좋은 것은 서두르지 마. 서양모과처럼 기다림 끝에야 참맛을 알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인내와 결실의 기쁨을 상징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귀족 정원, 그리고 시골 마을의 과수원에서 사람들은 서리가 내릴 때까지 저를 기다리며 늦가을의 희망을 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는 저를 “기다림의 달콤함”에 빗대어 노래했고,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작품 속에도 제 이름이 등장합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고전 정물화에는 노란 배와 붉은 사과 사이에서 은근히 빛나는 갈색 열매가 그려져 있는데, 그 작은 과일이 바로 저랍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겨울을 준비하는 마지막 계절의 색을 더해주는 존재로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지요.
며칠 전 9월 14일의 탄생화로 소개되었던 마르멜로(Marmelo), 즉 유럽모과(Quince, Cydonia oblonga) 역시 오래도록 우리말에서 ‘서양모과’라고 불려 왔습니다. 동양의 모과와 비슷한 향과 모양 덕분에 번역 초기에 저와 마르멜로 모두 같은 이름으로 소개된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저는 Mespilus germanica, 마르멜로는 Cydonia oblonga로 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종입니다. 이름은 같아도 향, 숙성 방식, 열매의 빛깔까지 서로 다르니 이제는 저희를 구분해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첫 서리를 맞아야 비로소 달콤해지는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단 하나입니다.
“기다림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인내 끝에 맺히는 결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깊고 진한 맛이랍니다.”
https://youtu.be/OrYo_iI5KSU?si=VqCKnUlxCT3RT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