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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나물-인왕산의 사라진 옥인아파트의 추억

11월 6일 탄생화

by 가야

등골나물 – 흰빛으로 남은 추억


나는 이름처럼 곧은 줄기에 흰 꽃을 피우는 등골나물(Eupatorium)입니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산자락이나 들판에서 하얀 구름처럼 무리지어 서 있지요.

오래 전, 인왕산 자락 옥인아파트 앞에서도 내가 피어 있었습니다.


아카시아 단풍이 우수수 떨어지던 늦가을, 한 남자와 여자가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햇살에 반짝이던 내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행복했지만, 알 수 없는 아련한 슬픔도 함께 느꼈지요.


지금은 옥인아파트도, 그 사람도 이 세상에 없지만,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낙엽 진 아카시아 숲, 그 아래 눈처럼 흩날리던 내 흰 꽃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선명한 가을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와 쓰임


사람들은 나를 등골나물이라 부릅니다. 줄기가 마디마다 뚜렷하게 갈라져 사람의 등뼈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물’이라는 이름은 풀을 뜯어 약이나 먹을거리로 삼던 옛사람들의 습관에서 붙여진 말입니다.


실제로 나는 민간에서 해열·이뇨에 쓰였지만, 일상적인 식용 나물은 아닙니다. 함부로 먹으면 위장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름에 ‘나물’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약초에 가까운 셈입니다.

세계의 등골나물


나는 전 세계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한국에서는 줄기가 등골을 닮아 등골나물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물가에 사는 약초라 하여 *澤蘭(택란)*이라 했습니다. 여성 질환과 어혈을 다스리는 약초로 쓰였지요.

일본에서는 가을마다 직박구리가 내 꽃 위로 몰려든다 하여 *ヒヨドリバナ(히요도리바나, 직박구리꽃)*라 불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직박구리는 한국의 참새처럼 흔한 새이지요.

미국에서는 나의 친척인 Eupatorium perfoliatum을 Boneset이라 불렀습니다. ‘뼈가 쑤시는 열병’을 치료하는 데 쓰였기 때문입니다. 또 Eutrochium purpureum은 Joe-Pye Weed라 불렸는데, 인디언 치료사 Joe Pye가 이 꽃으로 열병을 고쳤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Joe Pye는 중국의 화타(華佗)처럼, 그리고 우리나라의 허준처럼, 민간에서 사람들을 살린 치유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잎이 삼(大麻)을 닮았다 하여 Hemp-agrimony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원의 가을을 물들이는 관상식물로 사랑받았습니다.

예술 속의 등골나물


나는 문학과 예술 속에도 가끔 등장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필리아가 꽃을 뿌리며 노래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long purples’가 바로 나의 친척입니다. 죽음과 슬픔, 허망함을 상징하지요.

영국 시인 존 클레어는 농촌 풍경을 노래하며, 습지와 들판에 무리지어 핀 보랏빛 나를 시에 담았습니다.

북아메리카 민속에서는 ‘Joe-Pye Weed’ 전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나를 단순한 들꽃이 아니라, 치유와 믿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19세기 자연주의 화가들은 나의 흰빛·보랏빛 꽃 무리를 세밀화와 풍경화로 남겼습니다. 소박한 들꽃이었지만, 그림 속에서 나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상징했습니다.

내 꽃말은 ‘주저’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듯한 내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주저한다는 건 단순한 머뭇거림이 아닙니다. 때로는 신중함, 때로는 소중한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다는 간절함이기도 합니다.

아마 인왕산 자락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여인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떠나가는 계절 앞에서, 곁에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던 마음. 그것이 ‘주저’였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들판 어딘가에서 소박한 흰빛으로 서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름 없는 들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배경이 됩니다.

등골나물, 나의 흰 꽃은 주저하는 마음마저 삶의 한 장면으로 품어냅니다.


https://youtu.be/qN2NEWMysrU?si=4Rfg8DjJt9LVU3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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