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는동자꽃

11월 8일의 탄생화

by 가야

11월 8일의 탄생화, 가는동자꽃 이야기


저는 가는동자꽃(Lychnis kiusiana)입니다.
처음 저를 만나신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지요.


“생각보다 하느적거리고, 그다지 예쁘지 않네.”


맞습니다. 저는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국화처럼 오랫동안 사랑받지도 못했습니다.
잎과 줄기는 가늘어 바람만 불어도 쉽게 흔들리고, 꽃잎은 작고 갈라져 있어 사진 속에도 또렷하게 남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도 저만의 이야기가 숨어 있답니다.

◆ 제 이름의 유래


사람들은 저를 ‘가는동자꽃’이라 불러왔습니다.
제 친척인 동자꽃은 아이처럼 해맑고 발그레한 꽃인데, 저는 그보다 한결 가늘고 여려서 이름 앞에 ‘가는-’이 붙었지요.


‘동자(童子)’라는 말에는 순수와 해맑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제 작은 얼굴이 아이의 웃음을 닮았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학명에서 제 속명 Lychnis는 그리스어 ‘lychnos’(등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붉은 꽃잎을 불꽃에 빗대었고, 옛사람들은 제 몸을 불을 밝히는 데 쓰기도 했습니다.


종소명 kiusiana는 일본 규슈(九州) 지방에서 발견된 것에서 비롯되었지요.
제 이름에는 “아이의 꽃”, “불꽃의 꽃”, “기우슈의 꽃”이라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 제 색깔


많은 분들이 저를 붉은 꽃으로만 알고 계시지만, 저는 때때로 분홍빛으로도, 드물게는 하얀 얼굴로도 피어납니다.


붉은빛은 불꽃 같은 열정을, 분홍빛은 순수한 사랑을, 흰빛은 청순하고 깨끗한 지혜를 상징하지요.
색깔은 달라도, 모두 저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 제 꽃말, ‘기지’


사람들이 제게 붙여준 꽃말은 ‘기지(機智, wit)’입니다.

아마도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여린 듯 보이면서도 끈질기게 피어나는 제 모습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저는 화려한 무대에 서지는 못하지만, 은근한 지혜와 재치로 제 삶을 이어갑니다.
때로는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순간의 지혜로 빛을 남기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존재 방식입니다.

◆ 전설 대신, 앞으로의 이야기


저에겐 장미처럼 오래된 전설도, 국화처럼 수많은 예술작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설이 없다고 해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제 이름과 꽃말은 앞으로 새로운 시와 그림, 이야기 속에서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 보라매공원에서의 저


얼마 전, 보라매공원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서도 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화려한 꽃들에 쏠렸고, 저를 보고는 “예쁘지 않다”, “하느적거린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본래 그런 꽃이니까요.
곧추 서기보다는 바람과 함께 춤추고, 강렬한 빛보다는 은근한 선으로 존재하는 꽃이니까요.


◆ 사진에 잘 담기지 않는 꽃


저를 찍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바람결에 늘 초점이 어긋나고, 가까이 다가가도 꽃잎은 흐릿하게만 보인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사진 속보다는 기억 속에서 더 오래 남는 꽃일지도 모릅니다.


11월 8일에 태어나신 분들, 저와 인연을 맺으셨군요.
당신의 삶에도 저처럼 소박하지만 날카로운 재치, 순간을 밝혀주는 지혜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에겐 흔들리는 여린 풀꽃으로 보일지라도, 사실은 가장 단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 바로 당신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기억해 주세요.
저는 비록 당신들의 눈에 쏙 들어오지 않을지 몰라도, 열정과 사랑만은 그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세요.


오늘도 저는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불꽃처럼 세상에 제 빛을 남기고 있습니다.


https://youtu.be/fps4lNPxzs8?si=9ushM4BS3zGgHc5p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메리골드-세계 각 나라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