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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명자 눈을 밝혀주는 황금빛 기억

가야의 글방

by 가야

결명자: 눈을 밝혀주는 황금빛 기억

결명자가 우리 화단에 자라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부터였다.


어느 날 화단 한가운데서 낯선 풀이 돋아났는데, 이상하게도 그 풀이 낯설지 않았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60년 전,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운동장 끝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거기엔 코스모스와 아주까리가 하늘거렸고, 그 사이에 바로 이 풀이 자라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번이 커다란 주전자에 그 풀을 달인 물을 담아 교실로 가져왔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마셨다.


아이들은 그 물을 ‘오차(午茶)’라 불렀다.
점심 무렵(午時)에 마시는 차라서 붙은 이름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안다.
그 ‘오차’가 바로 결명자(決明子)였다.

세월을 건너 다시 찾아온 식물

그 결명자가 어느 날 우리 화단에 스스로 싹을 틔웠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바람이 씨앗을 데려왔을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대로 두었다.


가을이 되어 화단을 정리하던 날, 결명자 꼬투리 속에 잘 익은 씨앗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씨앗을 화단 곳곳에 뿌려두었다.


다음 해 몇몇이 발아했고, 올해는 아예 화단 앞자리에서 싹을 틔웠다.


오며가며 매일 눈을 맞추게 되었다.

결명자는 낮에는 해를 향해 잎을 활짝 펼치고,


저녁이면 마치 두 손을 모으듯 잎을 가지런히 접는다.
그 모습은 참 신비했다.


낮에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밤에는 자신을 향해 마음을 닫는 식물.
그 모습이 인생의 리듬과 닮아 있었다.


결명자, 눈을 밝히는 씨앗

결명자는 콩과(Fabaceae)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학명은 Senna obtusifolia 또는 Cassia obtusifolia.
키는 보통 1~1.5m쯤 자라고, 잎은 깃처럼 갈라진 복엽 구조를 이룬다.


7~8월 무렵, 잎겨드랑이에서 노란색의 작은 꽃이 핀다.


꽃잎은 다섯 장, 수술은 열 개.
꽃의 지름은 1~2cm 정도지만, 햇살을 머금으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꽃이 지면 꼬투리 모양의 열매가 맺히고, 그 안에 윤기 나는 씨앗이 줄지어 들어 있다.


이 씨앗이 바로 우리가 마시는 결명자차의 주재료다.


‘결명자(決明子)’란 이름은
‘결(決)’—열다, 통하게 하다,
‘명(明)’—밝게 하다, 눈을 밝힌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신농본초경』에는 “결명자는 눈의 피로를 풀고 시야를 맑게 한다”는 구절이 있고,
『동의보감』에도 눈을 밝히고 변비를 완화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밤늦게 글을 읽거나, 달빛 아래에서 붓을 들던 손을 멈추며
결명자차 한 잔으로 눈의 피로를 달랬다고 한다.

꽃말과 전해오는 이야기


결명자의 꽃말은 여러 자료에서 ‘광명(光明)’, ‘수줍음’, 또는 **‘끊임없는 사랑’**으로 전해진다.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 햇살 속에서 맑게 빛나는 그 모습에 잘 어울리는 의미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다.


달의 여신 항아(嫦娥)가 눈병 앓는 사람들을 위해
달빛에 실어 약초 씨앗을 내려 보냈는데,
그 씨앗이 바로 결명자가 되었다는 설화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던 아이가
황금빛 씨앗을 마시고 시력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문헌에 근거한 전설이라기보다,
‘눈을 밝히는 식물’에 대한 민간의 따뜻한 믿음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매일 마시는 황금빛 차 한 잔

나는 지금도 매일 아침 결명자차를 끓인다.


물속에 씨앗을 넣고 천천히 끓이면,
맑은 황금빛이 은은히 번지며 향이 피어난다.


그 빛깔은 마치 햇살을 머금은 찻잔 같다.
한 모금 마시면 눈이 맑아지고,
신기하게도 안구건조로 뻑뻑하던 눈이 촉촉해진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공눈물을 찾지만,
나는 결명자차를 마신다.


그 한 잔으로 눈의 피로가 사라지고, 마음까지 맑아진다.

결명자는 내게 단순한 약초가 아니다.


잊힌 시간을 불러내는 향기,
세월을 이어주는 생명의 씨앗,
그리고 오늘을 맑게 살아가게 해주는 작은 벗이다.


결명자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한 식물의 생태가 아니라,
열고 닫는 법, 그리고 조용히 피어나는 삶의 자세였다.

작은 정보 노트

• 학명: Senna obtusifolia (옛명 Cassia obtusifolia)
• 과명: 콩과 (Fabaceae)
• 꽃말: 광명, 수줍음, 끊임없는 사랑
• 주요 효능: 눈의 피로 완화, 간 해독, 변비 개선, 혈압 조절

� 결명자를 볶는 이유


결명자는 그냥 끓이지 않는다.
반드시 볶은 뒤에 차로 우린다.
그 이유에는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생활의 지혜가 숨어 있다.


결명자는 본래 찬 성질을 가진 식물이다.
그대로 끓이면 속이 냉한 사람은 복통을 느끼기도 한다.


볶는다는 건 단순히 향을 내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차가운 성질을 덜어내기 위한 일종의 ‘조율’이다.


열을 가해 약성을 누그러뜨리면
결명자는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차로 변한다.


볶는 과정에서 향도 달라진다.
생결명자에는 약간의 풋내와 비린 향이 있다.


그러나 약불에서 천천히 볶아주면
그 냄새가 사라지고 고소한 향이 피어난다.


결명자차 특유의 ‘보리차 같은 향’은
바로 이 볶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약효를 잘 우러나게 하기 위해서다.


결명자의 씨앗 껍질은 단단해서,
그대로 끓이면 속에 든 성분이 잘 나오지 않는다.


볶으면 껍질이 미세하게 열리며
눈에 좋은 안트라퀴논 성분이 물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볶은 결명자차는 더 진하고 깊은 색을 띤다.


마지막 이유는 보관성이다.
볶는 과정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곰팡이나 변질을 막아준다.
그래서 오래 두어도 향이 변하지 않는다.


어느 상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결명자를 볶을 때는 쌀을 몇 알 함께 넣어보세요.
쌀이 노르스름해지면 결명자도 잘 볶아진 겁니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남았다.


불 조절 하나에도 사람의 손맛이 있고,
그 속엔 세대를 이어온 감각이 담겨 있다.


결명자를 볶는다는 건,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차 한 잔의 온기를 준비하는 일이다.


차갑던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거칠던 향을 다듬고,
딱딱한 껍질 속 마음을 열게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결명자차 한 잔에는 늘 부드러움과 깊이가 함께 있다.


https://youtu.be/-FeNmGVzrxE?si=JepFIFyyuz9pgX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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