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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꽃 개미취 이야기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아름다운 우리 개미취 – 바람에 몸을 맡긴 꽃


서울식물원 한쪽 길,
가을 햇살 아래에서 나는 연보랏빛 들꽃 앞에 멈춰 섰다.


작은 바람에도 몸을 떨며 금세 쓰러질 듯한 그 꽃,
너무 여려서 손을 뻗어 지탱해주고 싶을 만큼 가녀린 존재였다.

그런데 그 부드러움 속에는 묘한 단단함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몸을 기울이고,
햇빛이 스치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그 꽃,
이름은 개미취(介眉菊, Aster scaber)였다.

이름의 오해, 그러나 아름다운 뜻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웃음이 났다.
‘개미취’라니, 혹시 개미가 좋아하는 취꽃인가?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름의 ‘개(介)’는 곤충이 아니라 ‘작다, 섬세하다’는 뜻의 한자다.
즉, ‘눈썹처럼 가는 잎을 가진 들국화’라는 의미다.


옛 문헌에는 ‘假薇菊’이라 표기된 경우도 있지만,
그 또한 ‘참미취를 닮은 들국화’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결국 개미취는 “부드럽고 여린, 그러나 참된 국화를 닮은 꽃”인 셈이다.


참미취가 조금 더 크고 단단한 언니라면,
개미취는 한층 수수하고 조심스러운 여동생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부드러운 여동생에게서
가을의 진짜 표정을 느꼈다 —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얼굴.


그런데 이 ‘참미취(眞薇菊)’라는 이름은
사실 우리말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학문적으로만 존재할 뿐,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벌개미취’로 불린다.

2022년 9월 23일 양천구청역 화단의 벌개미취

벌개미취(Aster tataricus, 아스터 타타리쿠스)는
개미취보다 키가 크고 곧게 자라는 국화과 식물이다.


보라빛 꽃이 풍성하게 피고,
한약재로는 ‘자완(紫菀)’이라 하여 기침약으로 쓰였다.


즉, 개미취는 ‘벌개미취(참미취)’를 닮은 들국화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름의 ‘개(假)’는 ‘거짓’이 아니라 ‘닮은’의 의미,
‘참’을 본받은 또 다른 ‘참’의 형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미취/ 벌개미취/ 쑥부쟁이

사전 속 개미취, 그리고 내가 만난 개미취


집에 돌아와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국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 높이 1.5~2미터.
7~10월에 엷은 자주색 꽃이 피며, 어린잎은 나물로 먹고 뿌리는 한약재로 쓴다.”


읽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서울식물원에서 본 개미취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허리춤 정도의 높이에,
줄기는 연약하고 유연했으며,
작은 바람에도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사전이 틀렸을 리는 없을 텐데 —
그런데 왜 내가 본 개미취와 이렇게 다를까?

개미취 사진 : 국립수목원

국립수목원의 사진과 내가 찍은 개미취


국립수목원 자료 속 개미취는
꽃송이가 크고 줄기가 곧고 단단했다.


하지만 내가 서울식물원에서 찍은 개미취는 달랐다.

꽃잎이 훨씬 작고, 연보라색이 부드러웠으며,
줄기는 거의 쓰러질 만큼 휘어 있었다.


바람이 불면 군락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놀랍게도, 어느 것도 부러지지 않았다.
서로에게 기대고, 굽으며, 끝내 살아남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전의 문장은 아마도
‘쑥부쟁이(Aster tataricus)’의 특징을 옮겨 적은 오래된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한때 이름과 형태가 뒤섞여 쓰였던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눈앞의 꽃을 믿기로 했다.


내가 만난 그 연보라빛 들꽃이,
분명 진짜 우리 땅의 개미취였다.

서울식물원의 안내문에서 다시 만난 진실


며칠 뒤, 서울식물원 홈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개미취(Aster tataricus)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며,
개미취 ‘진다이’는 줄기가 곧게 서 쓰러짐에 강하지만,
개미취는 상대적으로 수형이 쓰러지는 것이 많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그래, 내가 본 바로 그 모습이었다.

곧게 서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이 꽃의 고유한 수형이었다.


일본 품종 ‘진다이’가 단단히 곧게 선다면,
우리 개미취는 부드럽게 휘어지며 자란다.


바람과 타협하는 듯,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는 자세로.
단정한 곧음보다 유연한 곡선 속에
나는 우리 꽃의 미학을 보았다.

쓰러질 듯 유연한, 우리 개미취


그날 찍은 사진 속 개미취들은
거의 땅에 닿을 만큼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건 쓰러짐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하나의 생태적 균형이었다.
하루 종일 바람에 흔들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고개를 든다.
그 부드러움이 이 꽃의 생존 방식이었다.


사진은 조금 흔들렸고,
초점은 몇 장만 간신히 맞았다.


하지만 나중에 영상을 돌려보며 알았다.
그 흔들림이야말로 이 꽃의 숨결이었다.


쓰러질 듯 유연하고, 흔들릴수록 빛나는,
바람과 함께 피어난 우리 개미취.


사전보다, 표본보다, 더 정확한 기록은
바로 눈앞의 꽃이었다.


가을바람 속에서 유연하게 춤추던 그 모습이
이름보다 오래 내 마음에 남는다.


아름다운 우리 개미취,
오늘도 바람과 더불어 피어 있다.

사라진 자리, 남은 기억


그리고 어제 다시 서울식물원을 찾았다.
개미취를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가을 개미취가 무리로 피었던 자리에
이제는 작은 덩굴장미들이 피어 있었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미니종 서양장미였다.

너무 익숙한 꽃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바람에 몸을 맡기던 들꽃 대신,
줄에 묶인 장미가 고요히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우리 개미취는 사라졌는데 일본 개미취 ‘진다이’만이
여전히 이름표를 달고 그 옆에 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며 자라던 우리 꽃은
이제 정원의 목록에서 조용히 사라졌고,
대신 외래 품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진다이(ジンダイ) — 곧게 서고 쓰러지지 않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개미취’.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개미취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나던 꽃이었다.


사라진 건 꽃이 아니라,
바람에 몸을 맡기던 그 자세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우리 개미취,
그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잊지 않으리.


오늘도 어디선가,
가을의 바람 속에서 유연하게 피어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i9RjYBBgxhM?si=GjxPpeNdqetEWy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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