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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향유(邊山香薷)를 아시나요?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변산의 비밀을 품은 작은 보석, 변산향유


늦가을, 서울식물원의 희귀 식물 전시관을 거닐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선 끝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풀 한 포기가 걸렸습니다. 특유의 상쾌한 향이 코끝을 스칠 것만 같은 모습은 분명 우리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아(배초향)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일반 방아풀의 연한 녹색 줄기와는 달리, 이 식물의 줄기와 잎은 보랏빛의 깊은 그늘을 머금은 듯했습니다. 꽃차례는 더욱 진한 자줏빛으로 이삭을 이루며, 가을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잎을 만져보았습니다. 부드러운 초질이 아니라, 윤기가 흐르는 듯 단단하고 두꺼운 혁질(가죽질)의 촉감이 느껴졌습니다. 방아와는 분명 다른 어떤 고유한 품격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무심코 발아래 이름표에 눈길을 주었을 때, 비로소 저는 이 식물의 정체를 깨달았습니다. "변산향유 (邊山香薷)".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고고함과 생경함은 저를 곧장 책상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한반도 특산종으로, 오직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반도에서만 자생하는 이 작은 보석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식물의 정체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깊이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 잎새에 새긴 고독한 정체성

산향유는 방아풀과 같은 꿀풀과 향유속(Elsholtzia)에 속하지만, 그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한반도 특산종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얻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외관에 선명합니다.

줄기는 자주색을 띠고, 잎은 두껍고 윤기가 돌아 털이 거의 없다는 점이 일반 향유를 비롯한 유사종과 구별됩니다. 마치 거친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갑옷을 입은 듯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형태적 차이는 변산향유가 살아남은 변산반도의 환경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변산의 척박한 바위틈에서, 강한 햇살과 해풍을 견디기 위해 진화해 온 생존의 기록인 셈입니다. 늦가을(10월~11월) 피어나는 보랏빛 꽃은 이 끈질긴 생명력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었습니다.

2. 고문헌 속 변산의 향기와 약성

변산향유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시문이나 고문헌 기록은 없지만, 그 서식지인 변산반도와 속(屬)을 공유하는 향유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향유(香薷)는 조선시대 《세종실록》 등에도 등장하며, 더위를 다스리는 해열 및 발한 약재로 귀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변산향유가 지닌 잠재적인 약용 가치를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변산반도는 예부터 삼신산 중 하나로 불릴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했으며, 수많은 문인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부안 출신 시인 이매창의 애틋한 시조부터, 조찬한의 「변산가」에 담긴 웅장한 자연 묘사에 이르기까지, 변산의 흙과 바람은 예로부터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 왔습니다. 변산향유는 바로 이 역사와 문화의 터전에서 조용히 피어온 생명의 흔적입니다.

3. 변산향유, 지켜야 할 우리 모두의 유산


서울식물원에서 만난 변산향유는 저에게 그저 예쁜 꽃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했습니다. 이 식물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라는 거대한 자연유산 속에 존재하는 생물 다양성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보석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자생지의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지정과 함께, 전문 기관을 통한 현지 외 증식(ex-situ conservation)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이 꽃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명확합니다. 변산향유는 그 희소성 때문에 불법 채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 귀한 특산종이 영원히 우리 곁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는 자생지에서의 모든 인위적 간섭을 멈추고, 조용히 그 생명력을 응원해야 합니다.


한 장의 이름표가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듯, 변산향유는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자연유산을 가졌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줍니다. 변산의 비밀을 간직한 이 작은 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존'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되새겨주고 있습니다.


https://youtu.be/hMiToTD84Dg?si=KiuJjkNyLGOBXh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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