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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쑥부쟁이 – 가을 햇살 아래 가장 빛나는 들꽃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청화쑥부쟁이 – 가을 햇살 아래 가장 빛나는 들꽃


가을 첫날의 빛은 낮게 비켜 들어오고, 화단 앞줄의 청화쑥부쟁이는 그 빛을 가장 먼저 받아 반짝인다. 꽃잎은 옅은 청보랏빛으로 얇게 빚어졌고, 가운데 노란 통상화는 정오를 넘긴 햇살을 만나 금빛을 드러낸다.


나는 이 꽃 앞에 서면 언제나 마음이 느려진다. 번잡한 시간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으라는 신호처럼, 작은 꽃송이들이 바람결에 미세하게 흔들리며 하루를 길게 늘려준다.

청화쑥부쟁이를 둘러싼 이름과 분류는 생각보다 흥미롭다. 우리 정원과 시장에서는 ‘청화쑥부쟁이’라는 원예명으로 더 널리 부르는데, 대개 쑥부쟁이 무리의 청자빛 품종을 가리킨다. 학술적으로는 쑥부쟁이가 Aster yomena(동의어 Kalimeris yomena)로 분류되어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 자생한다. 여린 잎은 지역에 따라 나물로도 이용되어 왔다.

한편 원예 시장에서는 일본 계통의 청화 품종이 Aster ageratoides ‘Ezo Murasaki’ 혹은 Aster microcephalus var. ovatus로 유통되며, 이를 두루 ‘청화쑥부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름이 조금 뒤섞여 보일 수 있지만, 정원의 눈으로 보면 본질은 같다.

가을볕을 담는 엷은 청보랏빛과 오래 피어 있는 성정, 그리고 금사(金砂) 같은 꽃의 중심.

우리 회화의 세계에서 이 꽃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조선 후기의 화가들은 가을의 정취를 그릴 때, 기품 있는 정원 국화와 들의 소박한 국화를 한 화면에 섞어 놓곤 했다.


심전 안중식의 12폭 화조병풍에는 계절을 따라 꽃과 새가 이어지는데, 가을 장면에서는 국화가 만개해 화면의 중심을 지탱한다. 정제된 세필과 균형 잡힌 구도 속에서 국화는 늦가을의 빛이자 은근한 절개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민화 화조도에서도 국화는 장수와 청렴의 의미로 등장한다. 특히 국화와 중국단풍을 함께 그려 넣은 작품에서는 국화가 삶의 긴 여운을, 단풍이 인간의 성숙을 상징한다.

오원 장승업의 화조·잡화병풍에서는 국화가 괴석과 새, 짐승 사이에서 계절의 중심을 잡는다. 장승업은 강한 필선과 농담의 대비를 통해 국화의 생명력을 화면에 불어넣었다. 그에게 국화는 단지 가을의 소재가 아니라, 화면 전체의 호흡을 조율하는 늦가을의 맥박이었다.


조선 후기 병풍문화가 일상 장식과 의례의 장치로 확장되면서, 계절의 꽃들은 단순한 길상문양을 넘어 삶의 리듬을 그려내는 예술적 언어가 되었다.

나는 청화쑥부쟁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시대 화가들이 화면 한켠에 남겨둔 ‘조용한 중심’을 떠올린다. 눈부신 색으로 압도하지 않고, 자기 몫의 빛을 오래 지키는 태도. 그래서 이 꽃에는 그리움, 기다림, 추억 같은 말이 자연스레 붙는다.

늦가을의 볕은 짧고 바람은 얇지만, 꽃은 오랫동안 같은 색으로 버틴다. 시간이 지나도 변색이 덜한 수묵의 담묵처럼, 하루의 끝자락을 오래 붙드는 성정이다.

화단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청화쑥부쟁이는 낮은 키로 가장자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앞줄의 꽃이 환하게 웃어야 뒤의 식물들도 제 색을 얻는다.

조선의 화가들이 병풍의 여백을 읽듯, 나는 이 꽃의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공기를 읽는다. 꽃과 꽃 사이로 가을빛이 천천히 흘러가고, 그 빛은 오늘의 마음에도 단단한 금빛의 중심을 남긴다.



참고 문헌
국립수목원 「한국의 자생식물 도감」, 『조선시대 회화로 보는 사계의 꽃』(서울역사박물관, 2019), 『오원 장승업, 조선의 마지막 거장』(국립중앙박물관, 2015), 『조선의 병풍 – 사계절의 풍경과 마음』(국립중앙박물관, 2020), 『한국 민화의 세계』(예경, 2018).


https://youtu.be/0GXYeeqA1LQ?si=LfyhE1qDEGLNJQ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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