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 이야기
양천구 신트리공원 어린이 텃밭 둘레에서 뜻밖의 손님, 수세미를 만났습니다. 길쭉하고 통통한 열매가 늘어져 있고 그 옆에는 맑은 노란 꽃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에 스쳐 남았던 수세미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수세미의 원산지는 열대와 아열대 지역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 카리브해까지 닿아 있습니다. 학명은 aegyptiaca.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식물이며, 꽃말은 유유자적(悠悠自適). 길게 뻗어 나가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덩굴의 모습이 그 말의 의미와 참 잘 어울렸습니다.
수세미는 회화 속에서도 존재감을 남긴 식물이었습니다. 문인화에서는 박·오이·여주 등과 함께 덩굴을 그리며 계절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수세미는 ‘한 줄기 선’의 휘어짐을 가장 우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작은 노란 꽃과 조용히 늘어진 열매 하나만으로도 여름의 시간과 공기가 화면 위에 스며들었습니다. 덩굴의 한 획을 따라 번져가는 먹의 맥박이 곧 계절의 숨결이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한방에서는 말린 수세미를 사과락(絲瓜絡)이라 부르며 약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기관지의 열을 내리고 가래를 삭여 천식이나 축농증, 알레르기성 비염 등에 도움을 준다는 전승이 오래 남아 있고, 플라보노이드와 쿠마르산 덕분에 가벼운 피부 염증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성질이 차기 때문에 체질에 따라 배탈이나 설사를 부를 수 있어 과다 섭취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수세미는 피부에 직접 닿는 ‘물’이라는 형태로도 삶 속에 남아 있습니다. 명나라 《본초강목》에는 수세미 줄기에서 떨어지는 수액을 천라수(天羅水)라 기록했습니다.
늦가을, 저는 실제로 이 수액을 채취해 본 적이 있습니다. 줄기를 지면에서 약 20~30cm 정도 남기고 깨끗하게 절단한 뒤, 잘린 줄기 끝이 마르지 않도록 큰 패트병 입구로 약 5cm 정도 안쪽까지 넣어 밀어 넣고 병입구를 테이프로 단단히 밀봉해 두었습니다.
그러면 잘린 절단면에서 똑똑 떨어지는 투명한 수액이 그대로 병 안에 쌓입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아 3~4일이면 큰 패트병 한 개가 가득 찼습니다. 땅과 잎과 줄기를 지나 온 ‘시간의 물’이 눈앞에서 고여가는 것을 지켜보는 과정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직접 채취한 수세미 수액은 천연 화장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옛 기록에서는 궁중에서도 이 물을 피부 미용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래서 수세미 수액은 단순한 식물성 수액이 아니라 ‘귀한 미용수’라는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 수액을 기침 완화나 가래 배출을 돕는 약수처럼 소량씩 마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수세미의 피부 진정 성분을 응용해 화장품 원료로 활용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어, 수세미는 생활·약용·미용을 가로지르는 식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성숙한 수세미 열매는 섬유질을 남기며 말라가는데, 이 결은 설겆이용 수세미로만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먹이나 안료를 머금게 한 뒤 캔버스에 눌러 찍으면 붓으로는 나오지 않는 미세한 질감이 화면에 남습니다. 그것은 마치 식물의 속살이 남긴 지문 같았습니다.
수세미는 그렇게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왕래하며,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결까지도 천천히 떠올리게 하는 식물이었습니다. 오늘 텃밭 가장자리에서 마주한 그 노란 작은 꽃 하나는, 그저 단순한 야생의 순간이 아니라 생활의 기억과 예술의 감각이 겹쳐진 조용한 풍경이었습니다.
또한 수세미는 약재 외에도 식재료와 음료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습니다. 어린 열매를 잘게 썰어 설탕과 섞어 숙성시키는 발효액은 수세미의 유효 성분을 보다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승되었고, 이를 물에 희석해 마시면 기침과 가래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생열매를 짜서 얻는 수세미즙이나, 말린 열매와 줄기를 천천히 달여 마시는 수세미차 또한 꾸준히 마시면 폐와 기관지의 열을 내리고 담을 삭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경험적 신뢰가 남아 있습니다. 미세먼지 등으로 목이 칼칼한 시기에는 특히 이 음식과 음료의 쓰임이 ‘생활 속 미세한 치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세미의 추억과 약효, 그리고 다양한 쓰임을 두루 살펴보았습니다.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식물이 사실은 얼마나 우리 일상과 가까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유용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https://youtu.be/8MWEWV6rBwY?si=u76H6QVHLv2PjH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