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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의 구절초 – 잊힌 후원의 꽃

가야의 꽃 이야기

by 가야

낙선재의 구절초 – 잊힌 후원의 꽃

창덕궁 낙선재 후원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빈다. 사진을 찍고, 가을 햇살 아래를 거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오래된 담장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그 후원 옆을 돌아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다.

그곳에 흰 구절초가 피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그늘 속에서 구절초는 홀로 제 빛을 피우고 있었다. 햇살이 닿으면 은빛으로 반짝이고, 바람이 불면 미세하게 흔들리며 속삭이는 듯했다. 마치 이곳이 본래 자신들의 자리였다는 듯, 담백하고 조용하게 가을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나는 그 구절초를 바라보다 문득 덕혜옹주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이 후원이 바로 그녀가 말년을 보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궁궐의 이름과 달리, 그녀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쓸쓸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마지막 세월을 이 작은 후원에서 보냈던 그녀에게, 구절초의 하얀 꽃잎은 위로이자 동무였을지도 모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꽃들은 마치 “괜찮아요, 이제는 편히 쉬세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세상으로부터 잊힌 자리에서조차, 꽃은 누군가의 넋을 어루만지며 피어나고 있었다.

구절초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Chrysanthemum zawadskii var. latilobum (Maxim.) Kitam.*이다. 이 변종(latilobum)은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종, 즉 한국 특산식물로 기록되어 있다.


시베리아나 중국 북부의 야생국화에서 갈라져 나와, 오랜 세월 한반도의 산세와 바람, 햇살에 길들여지며 지금의 구절초로 자리 잡았다. 국화보다 조금 더 야생적이고, 들국화라 부르기에 가장 어울리는 얼굴을 지녔다.


가을 산을 오르다 보면 바위틈이나 산비탈 양지쪽에서 구절초를 만난다. 가녀린 줄기마다 피어난 흰 꽃송이들, 그 사이로 흐르는 은은한 향기. 사람들은 이 꽃을 ‘아홉 마디마다 한 송이씩 핀다’ 하여 구절초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 무렵에 가장 곱게 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말한다. 어느 쪽이든 구절초는 가을의 끝자락, 생의 마지막 향기처럼 우리 정서 깊은 곳에 닿아 있는 꽃이다.


옛이야기에는 효심 어린 여인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산에서 약초를 캐다 산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아홉 마디마다 피는 흰 꽃을 달여드리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꽃을 따다 달여드렸더니, 어머니가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 꽃이 바로 구절초였다. 그래서 구절초는 예로부터 효심과 사랑, 그리고 치유의 상징으로 전해 내려온다.

꽃말은 ‘가을의 향기’, ‘소박한 사랑’, ‘진심’.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향기를 남기는 꽃, 구절초는 조용히 자신을 피워내는 힘을 보여준다. 시인 정호승은 “산은 구절초 피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노래했고, 이해인은 “가을이 다 가도록 피어 있는 구절초는 산의 숨결 같은 꽃”이라 말했다. 두 시인의 언어처럼 구절초는 언제나 고요한 기다림 속에서 피어난다.

낙선재 후원의 구절초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된 궁궐의 담장과 꽃이 함께 세월을 견디는 풍경에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에 하늘거리며 피어 있는 구절초의 모습에서 덕혜옹주의 넋을 보는 듯한 숙연함이 밀려왔다. 화려한 궁궐의 기억도, 기구한 인생의 상처도 모두 내려놓은 듯, 그저 한 송이 꽃으로 남은 시간의 얼굴처럼 서 있었다.


구절초는 우리 땅의 바람과 흙이 빚어낸 꽃이다. 외래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한국의 들꽃. 이름처럼 아홉 번의 절을 올리듯 고개 숙인 모습으로,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피어난다. 그리고 이 계절이 오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와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올가을, 낙선재 후원에서 마주한 구절초 한 송이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 듯했다.
“세상은 변해도,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꽃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절을 올린다.
구절초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순수한 아름다움에게.


https://youtu.be/2h1jNSAEcDY?si=Vd39SQQq94Oh_K7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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