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운 시 30
무슨 말인지 모르던 때였다
‘생략’이란 말이
아버지가 숙제로 내준 다달학습을
풀다가 답안지를 베낀 말이다
답안지를 보지 말라고 하셨건만
빨리 끝내고 놀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엔 너무 어렸다
훔쳐본 답지에 적힌 짧은 글짓기 답안이
‘생략’이었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생략해 버리고
스스로 문제를 풀었다고 우기던 그 밤
아버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친근하던 아버지의 말들이 생략되었다
따스하던 웃음도 더불어 생략되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종아리에 아로새겨졌다.
그 혹독한 가르침 뒤로도
난 얼마나 많은걸
생략해 버렸을까
10년 전 아버지 먼저 떠나시고, 나는 아직 이승에 남아 아버지 가신 날 기준 삼아 살아갈 날이 얼마인가 가끔 헤아려보았다. 생각의 밑동은 조금씩 굵어져 의젓해지는가 싶다가도 금세 잔가지를 뻗쳐 아버지와의 소소한 추억들을 하나둘씩 호출해 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2학년 여름방학. 옆으로가 아닌 위로 넘겨서 문제를 풀어야 했던 ‘다달학습’지.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출퇴근하던 이상한 아버지가 사다 준 이상한 문제집이었다. 출근을 할 때면 나를 불러 오늘의 ‘To do list’를 당부, 확인하고 나가시던 아버지. 1주일 정도는 약속을 지켜 성실한 아들이 되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내 이름을 목놓아 불러대는 친구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만큼 막돼먹은 놈은 못되었다. 당일 풀어야 할 분량은 한참 남았지만 어린 나의 영혼은 머리 보다 가슴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일 줄 아는 훌륭한 영성(?)이 아직 살아 있었고, 건강한 삶은 ‘지금 여기’에 깊이 머물러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결국, 아버지가 숨겨놓은 답지를 찾아내 휘리릭 답을 달고 난 후, ‘다달학습’을 야무지게 덮고 총알처럼 튀어나가 친구들과 논과 밭과 들과 산을 갈고 다녔다. 아! 이어질 비극을 설핏 가늠하게 해 준 건 서편으로 넘어가던 태양이 보내준 신호, 그날따라 유난히 붉던 선홍빛 노을이었다. 초저녁, 불길하게 엄습해 오던 그 신호! 저녁에 숙제를 확인하던 아버지는 ‘생략’을 단서로 나의 죄과를 들춰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나는 종아리에서 타오르던 선홍빛 노을을 어루만지며 늦은 밤까지 회한에 파묻혔었다. ‘약속’과 ‘진실’을 생략해 버린 그날을 난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며 아버지를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