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숨보기 수행 4년 차, 1,300여 일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동안 세 번의 집중 수행을 거치며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대한 믿음은 깊어졌고, 내 마음의 파이에서 ‘선업’의 비중도 눈에 띄게 커졌다. 일상의 흔들림이 줄어들고 평온함이 깃드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수행자라는 이름 뒤에 숨은 나의 ‘분별심’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10여 년을 알고 지낸 한 지인에 대한 나의 시선이 그러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글은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무지와 오만했던 기준에 대한 통찰이자 참회록이다.
내가 본 그녀의 삶은 거친 파도의 연속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그녀였지만, 예기치 못한 삶의 선택들로 인해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홀로 자녀들을 양육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평생을 바친 일터에서도 불합리한 상황들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 과정에서 건강을 잃기도 하고, 믿었던 이에게 큰 경제적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노령의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늘 생각했다.
‘참으로 기구하고 안쓰러운 삶이다.’
그녀가 드라마 같은 고통의 줄거리를 전할 때면, 나는 공감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마음 밑바닥에는 ‘연민’과 ‘동정’이라는 이름의 미세한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저런 고통을 겪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비겁한 다행감이 내 안의 상대적 행복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그녀를 ‘불행한 삶의 전형’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그녀를 대할 때면 누구보다 친절했고,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자녀가 자리를 잡고 경사를 맞이할 때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내심 ‘그녀는 이제 충분히 보상받아야 해’라며 그녀의 인생을 내 멋대로 저울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알아차림의 순간이 왔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오는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나에게 주어진 것이니 그냥 할 뿐이다”라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
기쁜 일 앞에서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는 그녀의 덤덤한 표정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나’라고 내세울 고집이 없었다. 탐진치(貪瞋癡)의 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자기 인생의 관조자로 살고 있었다.
삶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기쁨과 슬픔을 구별하지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업(業)이 무엇인지, 인과가 무엇인지 지식으로 배우지 않았어도
그녀는 이미 삶의 철학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어지는 것을 그냥 한다”는 그 단순한 문장 속에,
내가 그토록 구하려 애쓰던 ‘통찰’과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며 은근한 우월감을 즐겼던 나의 무지가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상(相)’을 덧씌워 세상을 보아온 나의 모자람을 참회한다.
그녀는 공감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기에 감정의 파도에 끄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위기에도 여여(如如)할 수 있는 그녀야말로 진정 도(道)에 닿아 있는 분이었다.
수행은 오직 좌복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당을 쓸다가도, 공양간에서 밥을 짓다가도 도를 깨치는 이가 있듯, 그녀는 삶이라는 수행처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이제 그녀를 향했던 가당치 않은 연민과 동정을 접으려 한다.
그녀나 나나 다를 바 없는 생의 동반자일 뿐이다.
감히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않기로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공부인지 일깨워준 그녀가 참으로 고맙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진짜 얼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