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와 두목, 그리고 나와 ASA

이도저도 다 가져버려!

by 화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그리고 그를 기록한 카잔차키스도 함께 만났다. 그것은 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지성의 강렬한 충돌이자 만남이었다.


​과거에 연연하며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염려하며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오직 '현재'라는 찰나에 집중하며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사내, 조르바.

그는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관습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춤을 춘다.


이에 반해 자신을 ‘두목’이라 칭한 카잔차키스는

늘 머릿속 세계에 머물며 지식과 이성으로 삶을 해석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잉크 냄새나는 종이 위에 인생의 정답을 써 내려가려 고군분투하는 그는 어쩌면 관념이라는 감옥에 갇힌 포로일지도 모른다.


그는 니체, 붓다, 베르그송을 탐구하며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 했으나, 정작 눈앞의 생생한 삶 앞에서는 번번이 주춤거리고 망설인다.


​하지만 그는 조르바를 통해 깨닫는다.

니체의 ‘초인’도, 붓다의 ‘해탈’도, 베르그송의 ‘생명’도 결국 책장 속에 박제된 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난해한 관념과 철학은,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삶 속에 이미 뜨겁게 맥박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서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 생각해 본다.

지성인가 감성인가, 혹은 이성인가 본능인가.

누구에게 더 감정이입을 했는지 자문하니 답은 명확했다.


나는 조르바를 특이하고 유별난 존재로 바라보며 호기심을 탐닉하는 ‘구경꾼’에 가깝다. 그의 확고한 신념과 두려움 없는 태도에 경외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목’처럼 조르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그 파격적인 삶의 궤적을 함께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하는 경계인이다.


​사실 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지만,

조르바의 야성과 두목의 지성이라는

그 매력적인 지점들을 나의 자산으로 채우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 여정을 함께 걷는 친구들이 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소중한 모임

‘ASA’(아름다운 사람들)가 떠오른다.

13년 전, 우리 여섯 명은, 전공은 달랐으나 같은 주제와 방향성을 공유하며 뜨겁게 연구했다. 한 직장은 아니었지만, 연구팀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고민하고 공부하며 생의 희로애락을 나누었다.


주관과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었음에도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배움’과 ‘예술’을 사랑하는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품격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친구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무엇을 하든 진취적이고 열정적이며,

자기 주체적인 삶을 꾸려가는 그들을 보며 자극받고 배워나갔다.


​때로는 누군가의 탁월함 앞에 열등감으로 좌절하고, 때로는 작은 성취에 자만하며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응원해 주는 이들이었기에, 그 모든 시간은 나를 이루는 단단한 자산이 되었다.


​나는 이제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조르바의 뜨거움과 두목의 깊이를

'이도저도 다 가지게 해 주는'

ASA의 마력에 기꺼이 빠져들고자 한다.

나는 그들 속에서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배우고 성장하며 변하고 있다.

그래서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그 어떤 '됨'에도 걸림없는 삶을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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