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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Aug 19. 2024

8. 한국 컨텐츠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서야 영화 '파묘'를 겨우 겨우 볼 수 있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개봉한 이후에, 독일 극장가에서도 정식 개봉할 줄 알았는데, 이는 커녕 독일 IP로는 각종 OTT,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평소에 공포, 호러, 오컬트 물은 전혀 즐기지 않는 편이라 못 본다고 해서 크게 아쉬움은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온라인 상에서 '힙'하다고 바이럴이 커지자 보고 싶은 마음도 함께 커져버리게 되었다. 결국 유료 VPN을 구매하여, IP를 우회, 한국 계정으로 세팅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물론 구린 화질은 감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전혀 어려움은 없었다. 숨 졸였던 런닝타임이 끝나자마자 바로 든 생각은 영화의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독일어(혹은 영어)로 어떻게 번역했을까? 한국어와 상응하는 어휘들이 있었을까? 한국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문단에는 영화 내용 스포가 일부 있습니다.) 영화 '파묘'는 단순한 오컬트/호러 영화가 아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의 아픔을 이해해야만 스토리와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는 영화였다. 그래서 오히려 역사물에 크리처 장르를 결합시킨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국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무속신앙과 근현대사의 내용이 잘 버무려져 있어서, 아주 흥미로웠지만서도, 동시에 해외 관객들, 특히 서구권 관객들은 과연 이 메타포들과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한국의 귀신과 일본의 정령의 속성이 어떻게 다른지, 왜 일본은 조선에 쇠말뚝을 박으려했는지,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은 아픈 과거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지. 솔직히 어지간히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구권에서 아직까지도 '파묘'가 개봉을 안한 것이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국에 대해 깊게 알지 못하면 영화를 즐기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궁금증에 남편은 영화는 그냥 보는 거지, 뭘 배경지식이 있어야 봐~ 라며 상관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남편은 T다.)


사실 강남스타일, BTS 등의 선풍적인 인기 이후로 많은 한국 컨텐츠가 서구권까지도 대중화 되었지만, 내가 학생 때만해도 한류의 인기는 일부 아시아 국가들에 국한 되어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서양 친구들에겐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들을 추천해주기도 했었는데, 이게 은근 쉽지가 않았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감명 깊게 보았던 시대물들은 늘 배경지식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경제 성장, 민주화 운동... 비단 시대물 뿐만이 아니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 현상들에 대해 파고 들다보면, 한국이란 나라의 방대한 '서사'를 같이 설명해야만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컨텐츠들이 오히려 해외 시장에서는 인기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만 추억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응답하라' 시리즈는 해외에서 반응이 아주 미온했고, 천만관객을 동원해 흥행에 성공한 - 소위 말하는 국뽕 - 영화들도 해외 유명 영화제나 시상식에서는 이름을 찾기가 어려웠다. 한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서구권 친구들에게는 컨텐츠를 마냥 즐길 수 없게 만드는 어떤 허들이 된 것 같았다. 반면에, 일본문화는 어떤 장애물 없이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컨텐츠처럼 보였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해도, 대부분 에반게리온과 포켓몬은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가 거의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럼 또,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역사적 관계성을 오랜 시간 맺어왔는지 설명해야하는 것도 한국 사람들의 몫이였다. 


일본은 '탈맥락화'라는 전략을 통해 서구권에 본인들의 문화를 전파시켰다고 한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도 쉽게 컨텐츠를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몇 년 전, 강남스타일 10주년을 기념하여 기고한 '더 뉴요커'의 한 칼럼에서는 강남스타일은 일본의 탈맥락화 전략과는 다르게, 사회 풍자적인 요소를 가미했으며, 그게 열광적인 인기의 비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하지만 나는 이 의견에 100% 동의할 수 없었다. 일본 컨텐츠와 비교했을 때 그런 편이지, 강남스타일은 그동안의 한국 컨텐츠 중에서 가장 맥락이 없는 컨텐츠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강남스타일 뮤비를 처음 보았을 때, 맥락 없이 연결되는 시퀀스들과 싸이스러운 풍자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솔직히 지금도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맥락 없는 풍자가 한국의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을 깊이 이해하지 않아도, 음악과 춤만으로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요소였고, 이 지점이 바로 서구권까지 흥행할 수 있게 된 열쇠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강남스타일 이후에 인기를 몰고 있는 K-컨텐츠들은 한국 역사나 사회의 깊은 맥락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아보인다.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서사는 잠시 뒤로 하고,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전 세계인들이 당면한 문제점들에 오히려 포커스를 두고 있다. 선풍적인 인기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평단의 찬사까지 받은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은 한국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문제 의식을 제기하였지만, 사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 계급 갈등,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주제는 전 세계 어디서나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이기에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쉬웠다. 다만, 한국인들의 기구한 '서사' 대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전통 놀이를 한방울 첨가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요소를 넣는 변주를 주기도 했다. K-Pop 또한 가사, 세계관, 멤버들간의 관계성으로 팬덤 몰이를 했던 방식에서, 포인트 안무, 쇼츠, 챌린지들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이돌 개개인의 서사와 관계성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한류 컨텐츠들은 더이상 '정'과 '한'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배경지식이 필요해도,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할 수 밖에 없더라도, 나는 한국인만의 서사를 가득 담은 K-컨텐츠가 해외에 많이 수출되고 흥행하기를 바란다. 얼마 전 파리 올림픽 남자 서핑 은메달리스트가 올림픽 경기에 욱일기가 새겨진 서핑 보드로 출전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다행히도 한국 서핑 관계자들의 빠른 조치와 항의로 욱일기 보드가 경기에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선수의 입에서 그 어떤 사과나,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는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해외 서핑씬에서는 과거 욱일기 문양을 '탈맥락화'된 디자인적인 요소로 차용하여 마케팅에 적극 활용한 바 있었다. 그리고 해당 선수는 단지 그 스타일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 나치 문양을 마케팅적인 요소로 사용할 수 있을까? 나치의 잔혹성에 대해서,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 세계인이 다 알면서, 왜 군국주의 전범의 상징과 다름없는 욱일기는 몰랐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생기는 것일까? 해당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를 독일 공영 방송 중계를 통해서 전부 지켜보았다. 하지만 독일 해설자들 중 그 누구도 이 선수의 욱일기 논란을 설명하거나 지적하는 일은 없었고,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라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적어도 독일이라면, 나치 전범국이라면, 전쟁을 반성하는 국가라면 이 점을 언급했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BTS와 오징어게임이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여전히 '설명'을 필요하다는 사실이 조금 힘 빠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여전히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학원 첫날 난 내가 남한에서 왔다고(I'm from South Korea) 라고 소개했다. Korea 라고 하면 안되고 꼭 'South'를 붙여야한다고, 안그러면 외국인들이 우리를 북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교육 받아왔었다. 소개가 끝나고 어느 한 친구가 의아해하면서 물어봤다. 왜 한국인들은 꼭 자신을 'South'에서 왔다고 강조하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South에서 왔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남한에서 온 지 당연히 알 것이라는 뜻이었다. 북한의 인권 유린과 정보 통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해외로 여행이나 공부를 하러 올 기회조차 주어지지도 않고, 심지어 해외 경험이 허락된 엘리트층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절대 어울리지 않거나, 북한 출신이란 것을 밝히지 않을 것이란 걸 뉴스를 좀만 봐도 알텐데, 굳이 'South'에서 왔냐고 강조하는게 신기하다는 뜻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동안 South 에서 왔다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강조해왔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남과 북이 다르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 수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South 에서 왔다고 강조하며, North 에선 왜 여행을 올 수 없는지, 남북이 어떻게 다른지 끊임없이 설명해 온 한국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남북상황에 대해 다들 잘 알게 되었다.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마냥 효과가 없지는 않다는 의미였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고민 하나를 보게 되었다. 교환학생을 갈지 말지 고민 중인데, 외국어 실력이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사를 잘 몰라서 외국인 친구에게 잘 설명해줄 자신이 없어 고민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이런 마음가짐의 Gen Z가 있다는 사실이 참 기특하게 느껴졌다. 낡고 고리타분했던 교과서 속의 지문이 떠오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최근의 컨텐츠들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다는 이유로 '가장 한국적인 것'들은 조금 뒤로 하고 있는 것 같아보인다. 하지만, 한국인의 서사가, 역사가, 문화가 설명하기 귀찮을지라도, 구구절절 해보일지라도, 그래도 늘 우리는 끝까지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묘'가 독일에서 하루 빨리 정식 개봉되었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함께 보러가서, 영화 속의 수많은 한국적인 메타포들에 대해 기꺼이 설명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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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네카 강에서 바라본 하이델베르크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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