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어를 원서로만 배웠다. 원서라는 것이 거창한 것은 아니고, 독일 출판사에서 '외국어로서의 독일어(Deutsch als Fremdsprache)' 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한 교재들을 말한다. 사실 나는 그 어렵다는 독일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편인데 (재미있어도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지만...), 이 것은 내가 원서로만 공부해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남편의 책꽂이 한켠에 쳐박혀 있는, 한국식 '독일어 문법 교본'을 보았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버리고 싶었다. 남편이 독일어를 공부하기 아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딱딱한 문법 법칙들을 주로 설명하는 한국 교재들과는 달리, 원서 독일어 교재들은 좀 더 회화에 초점이 맞춰져있어서,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지문이나 텍스트의 내용들은 대부분 독일에서의 삶, 독일인들의 가치관과 생활규범들에 관련되어 있다. 독일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독일이란 곳과 독일인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독일에 정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독일에서 잘 적응하고 싶으면, 이러한 규범들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비록 교류하는 독일인은 우리 독일어 선생님 한 명 뿐일지라도, 독일 사회와 보편적인 생활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은 교재의 지문을 통해서 독일인의 삶을 엿볼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재의 테마는 취업, 취미, 인간관계 등 아주 다양한데, 어떤 출판사의 어떤 교재를 막론하고 늘 빠지지 않는 테마가 있다. 바로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이다. 그만큼 독일 사회에서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이 중요한 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알고보니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시장도 녹색당 소속, 시의회 제1정당도 녹색당이며, 심지어 독일의 경제부 장관까지 녹색당 출신이라고 하니, 환경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일인들의 인식이 개인적인 영역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최근 유럽 전역에 부는 극우바람으로 내년 독일 선거 결과는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다.) 독일 마트에서는 페트병과 유리병에 담긴 음료를 구매할 시 병에 대한 보증금을 함께 지불하고, 사용 후 이를 마트에 반환하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Pfand(판트) 라는 제도가 아주 잘 되어있다. 이 판트 제도 또한 2003년 녹색당 출신 환경부장관 시절 도입되어 정착된 것이라고 하니, 독일인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비단 최근 반짝하게 부는 유행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친환경/지속가능성 테마에서 소개되는 교재지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인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주로 한국에서는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은 더욱 발달한 '고도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기술과 제조업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기술 개발보다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의 작은 행동변화에서부터 환경문제를 개선시켜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아껴쓰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그 습관들이 어렸을 때부터 잘 베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건이 고장나면 새로 사기보다는 직접 수리 하거나, 중고 물품 가게에서 구매하는 것이 기본이다. 사실 중고 물품 거래는 한국에서도 중고나라나 당근마켓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새삼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물, 전기와 같은 자원을 절약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한국에서라면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구두쇠' 정신을 볼 수 있었다. 한번은 교재 지문에서 샤워할 때 5분동안 소비되는 물의 양이 50리터나 된다는 점, 온수 사용은 전기까지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하루 샤워시간을 10분 이상 넘기지말 것을 권장했다. 또한 설거지할 때 흘려내리는 물이 아까우니, 오히려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는 것이 물 절약 방법이라고, 다만 식기세척기도 그릇을 꽉꽉 채워서 돌려야 물과 전기를 아낄 수 있다고 추천했다. 나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샤워를 하는 편인데, 이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거의 환경파괴범(?)급의 지탄을 받았다. 독일인들이 잘 씻지 않아, 체취가 심한 경우도 있다고 종종 들었었는데,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샤워를 자주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어학원 수업은 낮 2시부터 4시반까지로 가장 일조량이 잘 드는 시간대이다. 그래서 어학원에서는 그리 어둡지 않다면 전기 절약을 위해 불을 굳이 키지 않을 것을 권장한다. 선생님도 오히려 형광등의 쨍한 빛이 눈을 안좋게 한다며, 흐린 날이 아닌 이상 불을 키지 않는다. 하지만 실내등에 익숙한 나는 교실에 늘 불을 켜고 싶고, 그래서 참다 참다(?) 답답해서 불을 켜는 것도 늘 나뿐이었다.
사실 나는 스스로 환경의식에 대해 몽매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개인의 삶의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 느리더라도 환경 보호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편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실천해온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분리수거 꼼꼼하게 하기, 일회용품 적게 사용하기, 포장용품 여러 번 사용하기, 당근마켓 이용하기, 에어콘 과도하기 키지 않기 등... 직접적인 사회운동을 하거나,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아주 경미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전기를 절약해야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독일인의 절약정신과 환경의식은 조금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 비용 등 자원비용이 그렇게 비싸지 않기 때문에, 절약하는 것과 아닌 것이 주는 경제적인 실효성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는 프리미엄이 붙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환경보호는 경제적인 이득추구보다는 단지 내 양심에 따른 행동에 가까웠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조금 달랐다. 독일 집에 입주하자마자 딸려있었던 오래된 세탁기가 고장났다. 워낙 구형 모델이었기 때문에 새로 사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저렴한 모델로 새로 살 수도 있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에 있다. 한국에서는 새로 구매하면 기사님이 배송부터 설치, 사용방법 안내까지 다 해주시는 반면에, 이 곳에서는 배송기사가 세탁기를 3층까지 배달해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설치와 기존 제품 폐기 또한 추가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수리 기사를 부르는 것도 고민해보았으나, 인건비가 비싼 독일에서는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직접 고치기로 결심했다. 유튜브에서 튜토리얼을 보고, 아마존에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부품만 구매했다. 그리고 다행히 세탁기는 아직까지도 잘 작동되고 있다. 세탁기를 '직접' 고치기로 한 우리의 결정에 '환경을 위해서'라는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기존 세탁기를 수리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전기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는 매달 정해진 금액만큼의 전기세를 내고, 연간 사용량에 따라 연말정산을 해 환급 받거나, 추가 지불한다. 지난 첫 연말정산에 어마무시한 추가 금액을 부담하고 나서야 전기를 독일인처럼, '구두쇠'처럼 아껴야한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매일 식기세척기를 돌리다가, 그릇이 가득 찰 때까지 며칠 모아서 돌리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식세기 안에는 쿰쿰한 냄새들로 세균이 번식할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매일 돌리기엔 전기세가 걱정되었다. 압력 밥솥이 전기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한 번에 밥을 많이 하고 얼려 놓고 먹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늘 밥이 퍼석해서 그리 맛있지는 않았다. 남편이 따듯한 흰 쌀밥을 먹고 싶다해도, 보온모드로 하면 전기 낭비하니깐 어쩔 수 없다고 냉동밥을 상에 올렸다. 으슬으슬하게 추운 날에는 혹시나 온수매트가 전기를 많이 잡아먹을까봐 따듯한 물주머니를 꼭 껴안고 지냈다. '지지리 궁상맞은'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환경 때문이 아닌, '전기세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행동들은 독일인들이 환경을 보호하고,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말이 떠올랐다. "고도로 발달한 거지는 환경 운동가와 다를 바가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 전체적으로 에너지 비용이 많이 올랐다는 뉴스는 한국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전기를 아끼는 것은 최근 높아진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그 비용이 부담되서 절약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독일은 풍력, 태양광과 같은 신재생에너지를 통해서 발전하는 비율도 상당하고, 이미 신재생에너지가 보편화 되어있다. 환경을 위해서다. 한국에서 신재생에너지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어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전기 공급이 어렵기 때문에 전기를 아껴쓰게 된 것일까? 아님 전기를 아껴쓰는 생활 습관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전기 공급이 적어도 상관없는 것일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기를 아끼는 것일까? 돈을 아끼기 위해서 전기를 아끼는 것일까? 무엇이 선후관계인지 알 수가 없지만, 독일인들의 구두쇠 습관들은 돈도 절약하면서 환경도 생각하는 일임에는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어쩔 때는 이렇게 궁상맞게 사는 구두쇠의 삶이 오히려 편안함을 줄 때도 있다. 옷차림이 그렇다. 독일인들이 지독한 패션 테러리스트임은 아주 잘 알려져있는 사실이다. 이 것은 단순히 코디, 스타일링의 영역을 넘어서서, 옷을 아주 오래동안 입는 습관까지도 포함한다. 옷이 헤지면 꿰매입기를 반복하다가, 더이상 도저히 입을 수 없을 때에서야 버리거나, 그럼에도 입을 수 있으면 기부한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지 몇 년 되었다. 물론 TPO에 따라 정말 필요한 옷은 구매하였지만, 단순 '스트레스 해소'나 '유행 따라 멋내기'를 위한 옷 구매는 지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심에는 기부된 수많은 옷들이 사실은 제3국에서 방치되어 엄청난 환경 오염을 유발한다는 EBS의 다큐를 본 계기도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옷 사는 돈을 아껴서 빨리 대출금을 갚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대신 새로운 옷이 입고 싶으면, 예전에 엄마가 입었던 옷들을 물려 입기 시작했다. 다행히 엄마는 많은 옷을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었고, 유행은 돌고 돌아서 지금 내가 입기에 스타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서 옛날 옷을 입고 있는 내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옷의 상태는 나쁘진 않았지만 세월로 인해 옷의 기름기가 많이 빠졌던 것이다. 광택 없는 옷처럼 내 인생도 조금은 광택이 없는 것이 아닐까. 돈이 없다고 옷을 사는데 돈을 쓰지 않고 오래된 옷을 입는 내 자신이 궁상 맞아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위의 동료들에게는 환경 다큐를 본 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내 스스로를 그린워싱(?)함으로써 정신승리했다. 사실 나는 환경 운동가로 포장한 고도의 거지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곳 독일에서는 옷차림에서 해방되었다.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름 어학원에서 친구들에게서 옷 예쁘다고 칭찬 많이 받았다.) 한 옷만 입어도, 옷이 조금 낡고 오래되도, 이게 독일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기름기가 없는 옷을 입어도 전혀 주눅이 들 일이 없었다. 옷 뿐만이 아니다. 판트(Pfand)를 위해 페트병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마트에 갈 때면, 가끔은 지지리 궁상 맞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트에 도착하면 페트병을 카트째로 싣고 오는 독일인들의 모습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아, 이게 여기선 당연한 것이면서, 환경을 위해서도 당연한 일구나, 다시 한 번 느끼며 아무렇지 않게 된다. 궁상 맞게 살아도 눈치 보이지 않는 것,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이 괜찮은 것. 그래서 고도의 거지와 환경운동가가 한끗차이라면 독일에서는 기꺼이 고도의 거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돈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호하고,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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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마인츠 도심을 거닐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