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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Sep 02. 2024

10.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 혼욕과 FKK

온천으로 유명한 충북의 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 남편은 온천과 목욕을 정말로 좋아한다. 하와이, 몰디브 같은 유명한 신혼여행지를 제쳐놓고, 홋카이도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정도니 사랑을 가히 알만하다. 그래서 독일에 온 이후에도 여행이나 근교 나들이는 온천 위주로 다니고 있다. 다행히 독일에도 크고 작은 온천도시들이 많아, 하나씩 도장깨기하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하다. 독일어로 Bad=목욕/baden=목욕하다라는 뜻으로 지명에 Bad가 붙은 곳들은 과거 온천이었거나, 현재까지도 온천시설이 있는 곳들이며, 꼭 온천 도시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지역마다 괜찮은 사우나가 하나씩은 있는 편이다. 그만큼 관광객들 뿐만아니라 독일인들에게도 목욕과 사우나는 일상 속에 녹아있는 힐링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도 사우나, 찜질방, 온천과 같은 대중 목욕 문화가 나름 발달해 있는지라 딱히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지만, 독일에서 온천과 사우나를 즐기는 방법은 한국과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대체로 아주 뜨거운 탕에 몸을 지지는 것이 중요한 한국의 욕탕 문화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건식/습식 사우나의 방식으로 몸을 달구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탕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온도가 한국보다는 높지 않아, 미지근한 물이 한국인들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탕 온도보다도 더 치명적인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에서는 목욕과 사우나를 "남녀 혼욕"으로 즐긴다는 것이었다. 


사실, 독일의 혼욕 문화는 익히 들어보았지만서도, 막상 직접 해본다고 하니 꽤나 긴장되었다. 솔직히 동양인 여성들끼리 여행가서 혼욕에 도전했다면 차마 못했을 같았는데, 남편이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용기가 생겼다. 나의 첫 혼욕 사우나 도전을 위해 지난 겨울, 독일에서도 제일 유명한 온천 관광지인 바덴바덴(Baden-Baden)으로 향했다. 1층의 탕들은 수영복을 입고 워터파크처럼 즐길 수 있었고, 2층은 성인만 출입할 수 있는 남녀 혼욕 사우나 구역이였다. 입구에서 수영복을 벗어두고 입장하는 방식이었다. 드디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혼욕 구역에 들어갔다. 90도가 넘는 건식사우나는 야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숲속의 작은 오두막 같아서 꽤나 운치가 있었다. 안에서 몸이 뜨끈해짐과 동시에 긴장되었던 마음은 차츰 편안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 이거 생각보다 할만한데...?" 


다행히 혼욕이라고 해서 사우나의 모든 공간을 남녀가 헐벗은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시설 안에서는 목욕가운이나 큰 타올로 몸을 가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매너였다. 탕이나 사우나에 들어갈 때만 가운을 벗고 이용하였다. 또, 습식/건식 사우나 안은 조명이 상당히 어두워서 다른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조명이 밝은 경우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아주 비매너적인 행동으로 절대 삼가해야하는 사항이었다. 혼욕 사우나에는 중년 이상의 남녀 커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내 또래의 커플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커플끼리 왔는데, 굳이 다른 성(性)의 나신을 쳐다보는 일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될일이다. 의외로 남자끼리, 여자끼리 온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나는 커플들이 즐길 수 있는 여가 중 하나라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남편과 온천을 갈 때면, 입구에서 헤어져서 각자 목욕을 즐기다 정해진 시간에 만나곤 했었는데, 여기서는 남편과 함께 사우나를 즐기며 심지어 함께 맥주 한 잔까지 함께 하니 진짜 휴가 같은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찜질방처럼, 책을 읽거나,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잘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무도 타인을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힐링만이 있을 뿐이었다. 


혼욕 사우나는 고대 로마식 목욕 방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의 영향을 받은 유럽 국가가 한 두 곳이 아닌데, 유독 독일에서만 혼욕 사우나가 성행하는 것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여러 연구들에서는 동독시절부터 특히 장려되어온 FKK 문화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특히 혼욕 사우나가 보편화된 것이라고 한다. FKK : Freikörperkultur. 한국어로 직역하면 자유(Frei) / 몸(Körper) / 문화(Kultur) 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한다는 뜻이다. 육체를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옷과 타인의 시선 등과 같은 억압과 차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자는 동독 시절의 자연주의 문화사조를 의미한다. 실제로 예전 동독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호수나 강가에서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수영이나 선탠을 즐기는 것이 흔하다. 누드비치 혹은 FKK-Zone(구역)이라고 별도 구분이 되어있기도 하지만(이 구역에서는 옷이나 수영복을 입는 것이 금지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굳이 구분되어있지 않더라도 호수에 그냥 훌렁훌렁 벗고 뛰어들어 자연을 즐기는 이들이 꽤나 있다. 나는 독일 서쪽에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근처에 등산을 갔다가 호수에 그냥 입수하며 더위를 식히는 커플을 보기도 하였다. 독일인들에게는 그냥 자유롭게 자연을 즐기며 힐링하는 행위인 것이다. 


아직 나는 혼성 누드비치 호수에서 수영까지는 도전해보지 못했다. 해보고 싶지만 기회가 없었기도 하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K-유교걸에게는 외부에서, 다른 성(性)도 있는 가운데 내 몸 전체를 들어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사우나에서는 대부분 가운을 입고 있기도 했고, 어둡고 폐쇄적인지라 그나마 할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가 헐벗고 수영을 하든 말든 독일 사람들은 나에게 정말 아무 관심 없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타인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반면에 나는 내 몸이 누군가에게 관능적인 의미로 비춰질까 늘 신경써왔고,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관습적으로 배워왔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 교복 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었고, 직장에서도 유니폼을 입었던 10년동안 늘 스타킹을 신었다. 얇은 옷이나 흰 옷을 입을 때는 속옷이 비치지 않을까 외출 전 늘 체크했다. 그런 내게 해가 환하게 비추는 대낮에, 드넓게 개방된 자연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있는다는 것은 기존의 내 모든 상식을 깨부수는 일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FKK-Zone에서는 내 몸은 그냥 몸덩어리이자 자연의 일부일 뿐, 누군가에게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식을 깨부수는 것, 기존의 권위와 차별을 철폐하는 FKK운동의 기본 취지에 어느 정도 동감이 갔다. 


실제로 FKK를 체험해 본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청 자유로운 해방감 속에서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한국 사회에서, 특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몸을 당당하게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FKK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 유니폼이 폐지되던 날, 나는 더운 여름에도 신었던 스타킹을 드디어 벗어던졌다. 배를 쪼이던 답답함과 구두 속 발의 찜찜함에서 벗어났을 때, 그 시원한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타킹 하나만으로도 이런데, 아무 것도 안입고 호수에서 수영하면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얼마나 더 클지 상상이 안간다. 


물론 독일에서도 FKK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혼욕 문화는 노인들의 문화로 전락했다고도 하고, 혼욕이나 FKK에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진 동양 여자들끼리만 혼욕이나 FKK를 가는 것은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 번은 혼욕 사우나에서 한 중국인 남자가 나와 남편을 지속적으로 쳐다보는 불쾌한 시선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몇몇 사우나들은 여성의 날, 남성의 날을 정해서 혼욕을 안하는 날을 운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FKK가 주는 메시지만큼은 꽤 의미있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말 것. 내 몸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내 외형이 어떻든지 당당할 것. 특히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해 판단하지 말고, 특히 관능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것. 외모지상주의와 성범죄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었다. 


지난 주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아주 상반된 뉴스를 보았다. 독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여성 운동의 일환으로 일반 수영장 시설에서 여성도 남성처럼 상체 탈의의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주장해왔었다. 그래서 작년 베를린에 이어 올해도 비키니 탑을 입지 않아도 되는 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였다. 신선했다. 반면에 한국 뉴스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딥페이크를 이용해 지인을 성적 대상화하여 능욕하는 성범죄가 학생들 사이에 심각하게 만연해있다는 보도였다. 신체의 자유를 찾아서 점점 더 몸을 노출하는 독일 여성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젠 개인 SNS에조차도 마음껏 본인 사진을 올릴 수 없는 한국 여성들. FKK의 정신이 한국 사회에는 전혀 적용될 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되어서는 더 큰 일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씁쓸해진 한 주 였다. 




독자분들께,

어느덧 10화 연재까지 마치게 되었네요. 

5화가 운좋게 다음 메인에 소개되면서 조회수 폭발의 기쁨도 잠시 누려보았는데요,

그 이후에 오히려 매번 재미있으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낼만한 글을 적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10화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늘 감사드리며, 

다음 화에도 흥미로운 독일 주재원 와이프 이야기 가지고 올게요. 


언제나 "댓글"과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계속되는 연재도 많은 응원 부탁드릴게요!


[사진 : 독일 바덴바덴 Trinkhalle의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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