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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Sep 09. 2024

11. 돈도, 스펙도 안되는 봉사활동

현재 나의 독일어 선생님 K는 독일어를 가르쳐주는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일 생활에 잘 적응하고, 독일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게 든든하게 도와주는 이웃 친구 같은 느낌이다. 물론 친구라고 하기엔 우리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K는 틈만 나면 나에게 "왜 독일에서 일을 하지 않느냐"라고 물어본다. 독일에서도 대다수의 젊은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고 있고, 특히 우리 부부에게는 아이도 없는데, 아직 한참 젊고, 의욕적인 성격의 내가 집에서 가정주부로 쉬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의 독일어 실력이면 충분히 독일 사회에서 독일어로도 일할 수 있는데, 배운 것을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을 더 안타까워했다. 그럴 때면, K에게 나도 일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세금과 비자 문제가 일차적이었지만, 이 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휴직 중인 직장에서의 겸업금지 조항이었다. 이 계약을 위반하면 한국으로 복귀했을 때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기고, 어설프게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겸업금지 조항이 보편적이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K에게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계약조항인듯 했다. 그러면 소득만 없으면 괜찮은 것이냐며, 나에게 '자원봉사활동'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권유하였다. 


처음 '자원봉사활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웃으면서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지만, 내 안에서는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진정으로 타인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해본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아예 없었던 것 같다. 학생 때는 대학 입시를 위한 시수를 채워야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이마저도 학교에서 알아서 프로그램을 세팅해주면 나는 그냥 몸만 다녀오면 되었다. 성인이 된 후, 결혼 전까지 성당에서 성가대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이 걸 진정한 봉사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합창하는 것을 좋아해서 취미 활동 같기도 하였고, 사실 봉사라기보다는 종교 활동에 좀 더 가까웠다. 회사 신입 때, 부서 사람들과 다같이 밥퍼 봉사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봉사활동 참여율에 따라 부서 실적 KPI에 가점이 있다고 해, 주말 아침 전 직원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비자발적인 봉사활동이라고 해서 설렁설렁한 적은 없었다. 그 순간에는 진심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다. 소위 말해 농땡이를 부린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봉사활동 종료 후에는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에 왜인지 모르게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의 봉사활동은 어느 한 구석이 늘 찜찜했다. 봉사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봉사활동을 이용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K가 권유하는 봉사활동을 기꺼이 시작할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봉사활동을 이용해 달성할 목적이 따로 없었다. 또, 수익이 나지 않는 일에 내 노동력을 쓰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이익을 창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하는 봉사활동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력서의 스펙 한 줄로 남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영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K는 독일인들을 사귀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나에게 지속적으로 권유하였고, 결국 나는 마지못해 시에서 운영하는 자원봉사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보게 되었다. 


홈페이지에는 정말 많은 봉사활동 구인공고가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상대로 말 벗을 하거나, 시간을 보내는 직무가 많았다. 그 다음으로는 방과 후 어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구하는 공고가 많았다. 그 밖에도 정말 다양한 종류의 봉사활동들이 있어서 다 읽어보기도 어려웠다. 솔직히 나는 어린 아이들이나 노인을 상대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왕 이번 봉사활동의 '목적'이 독일 사람들을 사귀고 독일 사회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라면, 적어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관심 가는 공고를 하나 발견하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 같은 곳으로, 기부물품 중고판매 상점에서 봉사자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2번의 면접과 2회차의 실습과정을 통과하고 드디어 정식 봉사자가 되었다. 한 타임에 함께 일하는 봉사자가 10명 정도는 되었는데, 차갑고 딱딱하다는 독일인들에 대한 선입견과는 달리, 다들 친절하고 의욕적이었다. 아시아인은 나 밖에 없었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다들 근속기간이 기본 2년에서 10년에 이를 정도로 오랜 시간 지역 사회에서 봉사해온 사람들이었다. 업무는 어려울 것은 없었다. 기부 받은 물건을 분류하고, 가격을 매기고, 쇼윈도에 진열하고, 매장을 정리하고... 단순하고 쉽지만 누군가는 해야만하는 그런 일들이었다. 그리고 이 쉬운 일들을 통해서, 독일에 온지 1년만에서야 집에만 있던 주재원 와이프에서 벗어나, 아주 잠시라도 독일 사회에 살짝 발을 담글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이번에도 나의 봉사활동은 순도 100%의 봉사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목적이 있는 봉사활동이었다. 배운 독일어를 활용하고, 독일 사회에 대해 알아가겠다는 것. 반면에 같이 일하는 동료 봉사자들에게는 딱히 특정한 목적의식이 없어보였다. 그냥 봉사활동은 봉사 그 자체일 뿐이었다. 


독일에서 정말 많이 쓰이는 동사 중에 engagieren 이라는 단어가 있다. 영어의 engage in과 같은 의미로 네이버 사전에 '~에 관여하다' 라는 뜻으로 짧게 설명되어있다. 그런데 간단한 번역으로는 뉘앙스를 완전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실제로는 뜻이 좀더 확장되어 '정치적인 활동, 사회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라는 표현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어딘가에 engagieren 하는 것이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고, 그래야 당당하게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실제로 39.7%*의 독일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봉사활동은 독일인들의 일상에서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혹은 20대에게는 FSJ (Freiwilliges Soziales Jahr = 자원봉사 사회참여의 해)이라는 제도가 있어, 젊었을 때부터 사회적 참여를 장려하기도 한다. 봉사활동만을 위해 1년동안 휴학하면서 사회에 기여함과 동시에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로, 이 학생들에게는 정부에서 일정 부분 재정적 지원까지 해주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봉사활동은 그냥 어떤 수단도 목적도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고, 민주시민의 응당한 의무처럼 보인다. 


반면에 한국의 자원봉사참여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2019년 16% 수준에서 2023년 10.6%의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니, 점점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에 대해 걱정할 자격이 될까? 물질이 최우선인 한국 사회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소중한 나의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비이성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스펙에 쓸 수 없는 활동을 오랜시간 공들여서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기부가게에서 일하는 것은 나에게 그 어떤 수익도, 스펙으로도 남지 않는다. 이번 봉사활동에 '독일 사회를 배우기 위한다'는 목적이 없었다면, K선생님이 강력추천하지 않았다면 과연 자발적인 마음으로 시작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대외적으로는 지속가능성에 관심이 많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중고물품 가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한 의욕적이고 개념 있는 한국인이었다. 솔직히 가게 일이 아직까지는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재활용되는 물품들로 환경을 보호하고, 불우이웃도 돕는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돈도, 스펙도 안되는 활동에 시간을 쏟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 아닐까라는 다소 부끄러운 마음의 불씨 또한 자그마하게 남아있다.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봉사하겠다는 그 순수한 마음 하나로만 자원봉사활동에 임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젠가 나에게도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게로 다시 향한다. 






*2019년 독일 내무부 통계자료, 14세 이상 정기적/비정기적 봉사활동 참여자 기준

**누리지표 자료, 13세 이상 1년에 자원 봉사 활동에 참여한 적 있는 사람들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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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의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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