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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젤리 Sep 23. 2024

13. 보이지 않아도, 여행은 즐겁다

친구들의 도전과 행보에 늘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나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더 늘 대단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R은 여느 동기들과 다를 바 없이 비슷한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나의 대학동기이다. 그런데 사실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선천적으로 볼 수 없는 전맹의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볼 수 없다고 해서, 그와 친구가 되는 일이 엄청나게 '다른' 일은 아니었다. 그저 여타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같이 수업을 듣고, 수업 후에는 술을 왕창 마시는 그런 대학생의 자유를 함께 즐겼다. 그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가끔 그가 요청하는 도움은 언제나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과 동기와 선후배 모두 그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 또한 여러가지 과 활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 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도 개방적인 학풍 덕분이었을까, 그와 어울리는 것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R 이외에도 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꽤나 많았었다. 언제 한 번 우리 학교에 놀러온 타 학교 친구가, 장애를 가진 대학생을 이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라고, 본인의 학교에서는 사실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가 R과 친구인 것이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대학시절에는 비슷한 수업을 듣고, 비슷한 일상을 보냈기 때문에, 신기하지도,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던 졸업 후 어느 날, R과 만나 저녁을 먹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헤어지게 되었다. 혼자 흰지팡이를 짚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는데, 뭔가 찡한 느낌이 들었다. 학창시절에는 강의실이나 기숙사까지 직접 데려다주는 일이 잦아 그의 뒷모습을 볼 일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서로 진로도, 갈길도 달라져서 혼자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조금은 쓸쓸해보이면서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용감한 개척자 같아보이기도 했다. 그 날 이후, 서로의 삶이 바빠 오랜시간 만나지는 못했지만, SNS을 통해서 그의 당당한 행보들을 늘 응원하였다. 


그런 그에게서 지난 겨울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독일로 여행을 온다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시절 여러 번 함께 답사와 MT를 다녀오기도 했고, 그는 다른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미국 배낭여행을 한 이력도 있기 때문에 그가 해외여행을 한다는 소식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저 으슬으슬하고 적적한 독일의 겨울에 고국에서 친구가 온다고 하니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2시간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넘어가서, 2시간 동안 점심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아주 짧디 짧은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이 신나는 소식을 어학원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누군가가 되물었다.


"볼 수 없는데 여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 


이 말은 나에겐 충격이었고, 조금 아프기까지 했다. 여행을, 특히 유럽여행을 '관광' 하고 'sight-see'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명한 역사적인 건축물을 관람하고, 서양 회화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자연 풍경을 즐기고... 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여행이라면, 당연히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R이 하려는 여행은 그런 '보는' 여행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즐기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특히 그 나라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어떤 배려들이 있는지 한국과 비교하고 경험하는 것이 주된 테마였다. 그의 여행은 단지 보는 것 이상의 더 큰 의미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독일 여행이 즐거울 수 있도록, 2시간이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내가 아는 독일 문화에 대해 최대한 그에게 알려주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독일에 입국하기도 전부터 독일 문화를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바로 독일의 파업 문화였다. 하필 그가 오는 날이 대대적으로 공항과 항공사가 파업하던 날로, 항공편 결항과 지연으로 독일로 도착하는 여정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이후엔 다른 도시로 가는 그의 기차 또한 (당연히) 연착이 되었는데, 지연과 취소, 파업을 일삼는 지긋지긋한 독일 기차(DB) 또한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당연히 불편하고 고된 경험이었지만, 독일인들의 파업 문화가 어떤지, 왜 독일 기차의 서비스가 악명이 높을 수 밖에 없는지 열심히 설명해주었고, R는 그렇게 독일인들의 불편한 일상생활의 일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나도 아직까지 적응 못하는 것이 바로 독일 식당에서의 주문과 계산이다. 벨을 누르면 종업원이 와서 주문 받고, 나가면서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방식에 너무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종업원과 어렵게 눈을 마주쳐서 주문을 하고, 식사 후 다시 한 번 어렵게 눈을 마주쳐서 자리에서 계산하는 독일의 방식은 여전히 어렵기 그지 없다. 큰 소리로 종업원을 부르거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일은 조금은 무례한 일로 취급되니, 독일에서의 외식은 늘 종업원과 눈을 마주치기 위한 고군분투이기도 했다. R과 함께 식사를 하며 독일 식당 예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그가 종업원과 어떻게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자리에는 내가 있어서 대신 종업원을 부를 수 있었지만, 그와 일행들끼리만 식당에 간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종업원의 센스나 친절함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의 대중교통, 특히 버스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최적화 되어있고, 기사부터 다른 승객까지 배려하는 문화가 잘 정착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독일에선 당연히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정책 또한 아주 정착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R이 독일로 여행지를 선택한 이유 또한,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고, 막연히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던 독일에서의 2시간 동안,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울퉁불퉁하고 오래된 돌바닥에 걸려 발을 자주 헛딛었고, 좁은 인도로 걷다가 위험할 뻔한 순간들도 있었다. 친절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독일 식당 종업원들은 흰지팡이를 들고 있다고 해서 갑자기 친절하게 돌변하지도 않았다. 신호등의 점멸 안내도 어디는 고장나고, 어디는 빨간불과 초록불이 같은 리듬으로 울려서 길을 건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R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독일에 퍽 실망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는 즐겁게 여행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어디인지 모르게 계속 찜찜했다. 내가 독일을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불편했던 2시간이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지난 주에 한 이메일 받았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후로 시 자원봉사센터에서 주기적으로 보내오는 구인 공고였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댄스워크샵 봉사자 모집"


그리고 나는 과거의 부끄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교를 입학하자마자, 과별로 신입생들끼리 겨루는 댄스대회가 있었고, 나는 안무 담당이 되어 동기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각고의 연습 끝에 대부분의 동기들이 함께 무대에 섰지만, R은 무대에 서지 못했다. R은 먼저 안무를 배우기 어려울 것 같으니 빠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R을 어떻게든 함께 참여시키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길 기다렸던 것 같다. 보이지 않는다고 춤을 못 추는 것도, 안무를 외우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댄스워크샵에서 자원봉사자가 도움을 주는 것처럼, 그저 내가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해 도왔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랬던 내가 과연 보지 못하는데 여행이 의미가 있냐는 말에 대신 상처받고, 불편하고 불친절한 독일에 먼저 실망할 수 있는 자격이 될까. 그가 다른 친구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다르다고, 그래서 다르게 대해야한다고 무의식이 구분짓고 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R이 다녀간 후에 왜인지 모를 찜찜한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사실 연착과 파업의 나라, 불친절한 식당,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거리는 비시각장애인들도 독일에 여행 오면 똑같이 느끼는 감상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배려하지 않는 독일에게 실망하는 내 모습은 어쩌면 오만일 수도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모든 여정을 스스로 잘 해냈으며, 충분히 여행을 즐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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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독일 마인츠 성 슈테판 성당, 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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