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마음이 어수선하여 대대적으로 방 안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방 한구석에서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버려진 듯 숨겨져 있던 부서진 낡은 시계였습니다. 이 낡은 시계가 저를 옛 기억 속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오래전 신용카드가 막 활성화되기 시작할 당시의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고객 모으기 이벤트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 당시 신용카드를 만들기만 하면 갖가지 사은품을 주는 이벤트가 정말 많았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고객에게 무조건 준다는 여러 가지 사은품들이 쭉 늘어서서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워낙 탐이 나는 사은품들이 많아서 그냥 지나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예쁜 시계를 보았습니다. ** 신용카드를 신청하는 고객에게 제공되는 사은품이었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저는 오랜 망설임 끝에 고객 등록을 하고 사은품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결정을 내린 뒤에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사은품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주는 것이 아니라 며칠 뒤 집으로 보내 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은품을 바로 받을 수 있을 줄 알고 내심 기대했던 저는 살짝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시계를 기다렸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 본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계는 뒷면의 시각을 맞추는 부분과 몸체 부분이 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내고 구매하여 받은 물건이 아니니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이 정도 사은품이 뭐 그리 안타까우랴.’ 하면서 지나쳐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시계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라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냥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고민한 뒤에 결국 안내문에 쓰여 있는 담당자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습니다. 전화가 연결된 후에도 여러 부서와 여러 사람을 거쳐 드디어 최종 담당자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 긴 설명도 아니었지만, 저의 상황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담당자가 분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분명히 시계는 깨지지 않았을 테지만,” 새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담긴 얼굴 표정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담당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열리려던 입은 저도 모르게 저절로 닫혔습니다.
어쩌면 담당자는 이 전화를 받기 전에 여러 고객들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수없이 걸려 오는 비슷한 전화에 담당자는 지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수많은 전화 속에는 진실도 있었을 것이고 거짓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저의 이야기가 신뢰를 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담당자는 원래 사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전혀 믿지 않고 당연히 거짓을 말하며 자신을 속였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잘못 알고 있다고, 당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구구절절 설명하더라도 그 담당자는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믿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저는 왜 그 담당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당시에는 말문이 막히고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야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 당시 어떻게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는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뒤 새 시계를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토록 씁쓸한 마음을 안은 채 왜 이 시계를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부서진 낡은 시계뿐입니다. 옛 기억 속에 잠긴 작은 마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