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품고 사는 누군가에게
그 독은 결국 스스로를 다치게 한다.
요즘 들어 자꾸만 누군가 내게 건넸던 조언이 머릿속을 맴돈다.
몇 년 전, 기자 생활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나는 총무와 부딪혔다. 그는 탕비실 일 전반을 홍보팀에게 떠넘겼고, 홍보팀이 홍보비 집행하는 부분 하나하나를 반대하고,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밥 먹는 자리 자체를 없애려 노력했다. 내 야근을 야근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야근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고, 내 출장비 지급을 자체적으로 스킵했다.
그게 그의 업무일 수 있다. 당시 난 그가 날 싫어해 그런 행위를 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맞섰다. 맞서고 넘어지고 혼자가 되고... 힘에 부쳐 결국 난 회사 총장님께 찾아갔다. 현재 이런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총장님 지시인 것이냐고.
총장님은 그런 지시를 내린 바 없고 해당 내용은 자신이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어 준 그는 내게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어릴 적 모습을 많이 떠올리거든? 그럴 때 드는 생각이 나는 정말 오기로, 독으로 살았구나. 정말 저 새끼한테는 지지 말아야지, 내가 꼭 저 새끼를 짓밟아 줘야지. 그랬어. 그렇게 지금의 직장을 얻었고. 그런데 지금 직장을 얻고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혈변이 멈추지 않는 거야. 내가 이 직업을 얻으려고 1년을 잠도 안 자면서 공부했는데. 그렇게 일주일을 고생했을까? 병원을 갔지. 그랬더니 대장을 잘라 내야 살 수 있대. 그렇게 대장을 잘라 내고 1년을 휴직했어. 그렇게 가장 성장할 시기에, 날아다닐 시기에 모든 게 멈춰버리는 거야. 결국 승진은 당연히 어려웠지.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독을 품고 살아서 그런 거 같어. 그 독으로 오기로 버텼는데 그게 내 몸에 차곡차곡 쌓여 버린 거지. 그리고 그 독이 내 인생 황금기에 내 발목을 잡아 버린 거야. 그래서 이젠 그냥 져줘. 저번에 김 기자가 그랬잖아. 왜 일은 총장님이 다하고 공치사는 엄한 인간들이 하냐고. 그냥, 그렇게 져 줘. 그냥 양보하면 돼. 어렵겠지. 얼마나 뜨거울 나이야, 얼마나 혈기가 끓는 성정이야. 아는데 나중에 그 독기가 발목을 잡지 않게 그냥 보내줘.”
그렇게 담담한 듯 자신의 건강 상태를 고백했던 그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단풍잎이 물들기 시작한 거리를 유유히 걸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선뜻 와닿지 않았다. 왜? 왜 져줘야 하는데, 내가 왜 양보해야 하는데? 내가 틀리지 않았잖아. 내가 옳은 거잖아. 그런데 왜?
마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이 품은 독기에 자신이 찔리는 줄도 모르고 외롭게 살아가는 인간을 보며 총장님이 떠올랐다.
최근 독을 품고 사는 이와 잠시 스쳤다. 소름이 끼쳤다. 오로지 독으로만 버티고 있는 게 보이는 그가 너무나 위태로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전방위적으로 독기를 뿜어내며 모든 이를 적으로 돌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불쌍하기도 했고, 그런 자신에게 손 내민 나에게 마저 독을 뿜는 그를 보며 안타까웠다. 평생 외로웠겠구나. 오로지 독만 품고 사니 자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마저 뿌리쳐버리는구나.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단풍잎 사이로 유유히 걷던 총장님이 생각났다. 총장님은 그런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구나. 그런 내가 나이가 들어 외로워질까 걱정되는 마음에 미리 그런 말을 해주셨던 거구나.
참 좋은 어른. 그와 여전히 연락을 나누지만, 일상 속 이렇게 잔잔한 여운과 깨달음을 남겨줄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따뜻하지만 나른한 조언이 나를 성장케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달함으로써 내게 조언을 남겼던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지는 오늘.
내 인생에 감사한 일 하나, 정말 비뚤어질 때면 언제나 나를 바로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남들처럼 온전한 부모는 없었지만, 애정으로 지켜봐 주고 옳은 길로 인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요즘도 그렇다. 나를 쥐고 흔들려는 사람들에게서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
직장 동료이자, 인생 선배인 한 사람 덕분이다. 그는 폭풍에 휘말린 내게 말했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안다. 그간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면 얼마나 치열했을지, 뜨거웠을지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그에 당신의 방법으로 맞서 살아왔음을 잘 안다. 그런데 이번 한 번만 날 믿고 차분히 숨 고르고 때를 기다리자.
그렇게 폭풍의 눈 한가운데 서 있던 나를 꺼내 줬다. 그렇게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줬다. 남인데, 너무나 남인데 이렇게 애정을 갖고 나를 붙잡아주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비뚤어질 수 없다. 나는 악해질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또 사회 어른을 만나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