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사랑해서 상처받는 이들에게
나누고 싶었던 위로
올해 초, 신점을 봤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다닌다.
대체로 많은 무속인은 ‘신빨’이 없어 보였다.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 건강 조심, 무난하다, 네가 기가 세서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
뭘 기대했을까. 사실 딱히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궁금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냥 정말 그냥 심점을 보러 간다.
올해 초 보러 간 무속인은 조금 달랐다. 그나마 세세히 이것저것을 맞췄다. 어렸을 적 잘 버텨왔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대견하다 말했다. 여기서 살짝 치고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올해가 정말 힘들다. 삼재에, 칠살까지. 지금까지 중 가장 힘들 때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견디면 끝난다는 걸 명심했으면 한다.
그 말에 가슴속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작년, 내 인생에 정말 최악이었는데 작년보다 힘들다니. 그건 그냥 그만 살라는 말 아닐까?
그런데 그 이후 그 무속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사람마다 가진 에너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10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10중에 1~2만 남을 위해 쏟는다. 그런데 너는 10이면 10을 다 타인을 위해 쏟는데 그 타인이 워낙 많다 보니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0.5~1 정도만 받아서 고마운 줄도 모른다. 그런데 너는 네가 가진 걸 다 쏟아 버리니 힘들고 지친다.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는 덕을 쌓는 거라 생각한다. 당신이 쏟은 그 정성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마흔, 네 팔자가 양팔에 쌀가마니를 차고 산다는데 아마 그때를 위해 지금 이렇게 공을 쌓고 있는 거라고. 절대 노력과 덕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말에 한참을 울었다. 맞다. 사실 뭘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호의를 베풀었다. 내 호의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대체로 어느 순간 내 호의가 당연해지고 본인들이 누려야 할 권리처럼 굴던 사람들.
내 호의를 이용해 본인의 죄악을 덮으려던 상간녀. 이런 날 앞세워 상간녀와 싸움을 붙여 송사에 휘말리게 한 회사 임원들. 송사에 휘말리자 모르쇠 일관하던 그 사람들, 송사가 끝나자 이젠 나를 내보내려 혈안이 됐던 그 사람들.
작년 그렇게 힘들었다. 그냥 이 호구 같은 내 성격이 문제인가, 내가 애정결핍이라 이렇게 퍼주고 뒤통수 맞고도 여전히 오지랖을 내버리지 못하는 걸까.
나에 대한 원망과 자책이 쌓여가던 와중 그 무속인의 말, 결국 다 네 복으로 돌아온다. 하늘은 다 안다는 그 말이 너무 큰 위로가 됐다.
요즘도 종종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떨 때는 회사 동료의 모습으로, 친구의 모습으로.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을 만나온 내가 본인들을 간파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속내를 숨긴 척 이야기를 한다.
이럴 때 지난날의 나는 상처를 받았다. 내가 또 바보처럼 굴었구나. 내가 또 만만해 보였구나. 그렇게 스스로 자책했다,
지금의 난 되뇐다. 이 사람한테 이걸 내준다고 나의 오늘이 위태로운가? 나의 내일이 불행할까? 아니. 그렇다면 내주자. 원하는 걸 내어주자. 이렇게 덕을 쌓아 십 년 뒤 내 양팔에 있을 쌀가마니를 불린다 생각하자.
참, 그 말이 뭐라고. 자책과 상처 대신, 미래의 나에게 하는 저축이라 생각하게 하는지.
이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 너무 맑아서, 욕심 없이 타인을 사랑해서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항상 내어주는 것에 익숙한, 본인이 신고 있는 단 한 켤레뿐인 양말마저 벗어주는 그런 이들. 그래서 영악한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는 이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 덕이 되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 거라는 거. 미래의 나에게 저금하는 거라는 걸. 상처받을 필요 없이 10년 뒤 한없이 행복할 스스로를 그려보라고.
나 역시 그 말에 위로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