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시 같은 단어가 있다.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불편한 단어.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따끔따끔 존재감을 나타내며 거슬리게 하는 그런 단어. 누군가에게는 그 단어가 남편일 수도, 형일 수도, 언니일 수도 있다. 내게는 그 단어가 ‘엄마’다.
불편한 단어. 아직까지 어디 내어 보지 못한 말. 내 평생 숙제처럼 안고 가야 하는 ‘엄마 용서하기.’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용서하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참, 아이러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용서를 빌지 않았는데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게.
그래서 지금껏 마음속 깊은 곳 묻어놓았다.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다. 청첩장에서 과감하게 엄마 이름을 뺐다. 청첩장을 건넬 때 사람들 눈에는 물음표가 가득하다. 그러나 선뜻 묻지 못한다. 다 알고 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웃음으로 침묵을 강요했다.
미디어에 나오는 엄마가 따뜻하고 자식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하는 이들로 그려질 때면 박탈감이 들었다. 이상한 화도 났었다. 세상 모든 엄마가 저렇지 않은데 혹은 나는 왜 저런 엄마가 없을까.
내 결핍의 대부분은 그녀로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녀는 내게 울타리였던 적이 없었다. 아빠의 사랑이 내게 쏠릴 때면 나는 그녀에게 경쟁자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내게 악담을 퍼붓곤 했다. 열심히 공부해 상장을 받아온 날, 아빠는 그런 내가 대견하단 듯 용돈을 주며 내가 받아온 상장을 챙겨 친구들에게 자랑하러 나갔다. 그런 아빠가 나가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성격이 더러운 네가 무슨 공부냐? 술집이나 나가서 돈이나 벌면 다행이지.”
공장도 아니고 술집?이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난 입을 닫았다. 입을 열면 퍼부어질 폭력이 무서워서. 아니, 귀찮아서.
그녀는 내게 옷 한 벌 사주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 사촌 언니는 본인이 입던 모든 옷을 물려줬고, 가방을 물려줬다. 때가 되면 유행하는 브랜드의 신발을 사주기도 했었다.
어느 날, 그 신발과 가방이 사라졌다. 어디 있냐는 내 물음에 모른 체하던 그녀는 계속되는 추궁에 답했다.
“폐지 줍는 할머니 손녀가 불쌍해서 줬다.”
나는...? 신발을 사주지 않아 구멍 나고 헤져버린 신발을 감추기 위해, 새 신발을 사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는 나는 불쌍하지 않은 걸까? 그런 내가 불쌍해 언니가 사준 신발인데 그것조차 아까워 신지도 못하고 아껴뒀던 건데. 어린 마음에 대들었다. 결과는 뻔했다. 머리카락을 뜯기고 얼굴에 노란 멍이 들 때까지 맞았고 결국 울며 집을 나왔었다.
그렇게 날 때리지 않는 날에는 날 붙잡고 본인의 불행을 하소연했다. 어릴 적 부모가 어땠고, 지금 너네 아빠가 어떻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우는 모습, 화난 모습, 소리 지르는 모습, 때리는 모습만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녀가 웃었으면 했다. 행복했으면 했다. 로즈데이, 아빠가 준 용돈을 털어 비 오는 날 동생과 손잡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사다 줬다. 웃을 줄 알았다. 고맙다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비 오는 날 그날도 죽어라 맞았다. 이유는 비 오는 날, 귀한 아들 비 맞게 했다고.
그렇게 맞을 때면 생각했다. 맞다가 죽는 사람이 많은데 왜 난 죽지 않을까. 왜 내 명은 이렇게 길까. 이렇게 아픈데 왜 살아있는 걸까.
열아홉. 수시 원서 작성을 해야 하는 시기. 교무실에는 열성 부모들이 가득했고 아이들은 몇 달 뒤 내가 있을 곳이 어디일까란 생각에 걱정 반, 설렘 반 예쁜 표정으로 붕 떠있었다. 수시 원서 비용은 한 건에 8만 원~10만 원 선이었던 것 같다. 수시 원서 비용을 달라는 말에 그녀는 역시나 네가 무슨 대학이냐, 돈이나 벌어 와. 라며 일축했다.
주말에는 공장에서 살았다. 그 당시 주말 야간을 하면 하루에 10만 원에 달하는 돈을 벌었었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 토요일 저녁 일하고 받은 일당으로 수시 원서를 썼었다.
그렇게 스무 살, 성적이 아닌 집에서 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학교를 정했고 지옥에서 탈출했다. 탈출했지만 탈출하지 못했다. 몸이 멀어 때리지 못하니 하루에 수십 번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온갖 상스런 폭언과 욕설이 쏟아졌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자 폭탄이 이어졌다.
그렇게 병들어 갔다. 그렇지만 날 놓을 수 없기에 악에 받쳐 열심히 살았던 거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척. 그런 그녀는 갑작스레 이혼을 발표했다. 응원해 달라 말했다. 원하는 대로 응원했다. 그리고 곧 새아빠라며 그 남자를 데리고 내가 있는 지방까지 왔다. 내가 애교 떨고 내가 딸 노릇을 해야 한다며. 이 남자가 아들보다 딸을 좋아한다며. 그래, 이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죽었다 생각하고 원하는 모든 비위를 맞췄다. 한동안 행복한 그녀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 행복도 잠시 알코올 중독이던 그녀는 결국 그 민낯을 들켰고 그녀가 술에 절어 사고를 치는 날이면 이제 그 전화는 그 남자에게 걸려왔다.
끼리끼리 는 싸이언스라는 말을 증명했다. 그 남자 역시 술 한 잔 한 듯 꼬인 발음으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게 내 인생인가? 하늘은 지금 내게 스스로 생을 마감할 기회를 주는 걸까 싶었다. 둘이 행복한 날에는 또 잠잠했다. 그렇게 둘은 나를 본인들의 장난감처럼 부쉈다, 내버려 뒀다, 집어던졌다를 반복했다. 그 학대 속에서 사실 정신줄을 놓지 못한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차라리 미쳐버리면 살 것 같아서.
그렇게 3년 간 내 목을 조르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내 동생들이 머물던, 내가 집이라 부르던 그 공간의 보증금을 빼서 사라졌다. 그때의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 켠으로는 시원했고, 나는 무슨 저주를 받은 걸까 생각했고 나만 바라보는 동생들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며 당장 살 곳을 구해야 했다. 이제 스물넷. 그 어린 나이의 나는 이곳저곳 빌며 보증금을 마련했다. 보증금을 마련해 우리 삼 남매가 머물 곳을 마련했고, 그 여자와 그 남자가 남기고 간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정리하며 울고 욕하고 원망하다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부해야 한다. 내가 무너지길 바란 그들의 바람에 부응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1년 낮에는 도서관을 밤에는 호프집 서빙을, 주말에는 논술 강사를 하며 살아냈다.
그렇게 살아내서 일까. 나는 못난 모습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인정하기보다 시기했고 미워했고 짓밟으려 했었던 것 같다. 그 못난 모습 들킬까 애써 웃으며 혹은 숨으며 회피해왔다. 그리고 사람의 정이 그리워 사람 간의 거리 유지를 전혀 하지 못한 채 매달리려 했다. 매번 행복보단 눈앞의 불행만 선명하게 봤고 입으로 내뱉었다. 한 숨을 달고 살았다. 옷도, 신발도, 가방도 낡아 빠져 누군가 날 무시할까 사람들에게 가시부터 세웠다.
그런 내가 웃음이 많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뎠는지. 받지 않았어도 될 상처로 회복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지난날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다. 못난 모습이 나올 때면 숨을 한번 참는다. 그리고 책을 꺼낸다. 그렇게 잠시 나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 못난 모습을 감춰본다. 그래서 아직 나는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어머니는...?이라는 질문에 어설픈 미소로 상대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이 상흔을 누군가에게 꺼내놓기까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