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그리고 느낀 점
샤넬을 가졌지만, 부끄러웠다.
아주 검소한 내 짝꿍은 명품 소비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월 200~300 버는 사람이 태반일 텐데 비도 못 맞는 가방 하나에 삼백만 원이 훌쩍 넘는 걸 산다는 행위가 납득되진 않는다 말했다.
그는 저축을 좋아하고, 부동산을 좋아한다. 그의 소비행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데 동의한다. 그렇지만, 가방은, 그냥 행복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엄마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방을 보고 행복해하는 진짜 웃음을 보고 공감한다 말했다.
다들 결혼하면 가방을 하나씩 산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온 내 짝꿍은 내게 신혼여행 가서 가방을 살 거냐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장난 반 진심 반 “뉴욕은 샤넬 매장 웨이팅이 없대!”를 외쳤었다.
그 말에 절레절레하면서도 반쯤 포기한 말투로 “그래. 그래라.”를 내뱉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친 듯이 올라 버린 환율. 이 환율에 관세까지 내고, 뉴욕시에서 부과하는 세금까지 내면 사실 한국에서 프리미엄가를 얹어 사는 것보다 비쌀 수 있었다.
그 말을 짝꿍에게 전하며 “아무래도 샤넬은 나랑 연이 아닌가 봐.”
그 말이 짠했던 걸까. 면세점 쇼핑을 가자며 간 백화점에서 샤넬 웨이팅을 걸었다. 면세점 쇼핑을 한참 한 뒤 입장하란 연락에 입장했다. 소문대로 물건도 없고, 비쌌다. 그런데 하필 내가 갖고 싶었던 가방이 있었다. 문제는 색상이 블랙이 아니라는 것.
한참을 고민했다. 고민하던 내게 셀러가 물었다.
“블랙 가방이 있으세요?”
“네.”
“자기 블랙은 많잖아.”
“블랙이 좀 있으시면 유색도 괜찮아요.”
사실 그다음으로 걸리는 건 가격이었다. 700만 원에 육박하는 가방 가격.
그런 내게 짝꿍은 “사. 사. 갖고 싶음 사야지.”
그렇게 내 품에 들어온 가방은 행복이었다. 잠옷 위에 메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 있는 날 보며 짝꿍은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행복하냐며.
가방을 산지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회사 대표님 수행할 일이 있었고 일정을 마친 뒤 카페에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대표님과 자연스레 일상 이야기를 하다 명품 가방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대표님은 자신의 가방은 7만 원짜리라 말해줬다. 그리고 사실 본인이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 할 때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한껏 꾸미고 사실, 잘 보일 사람이 없는 빌딩 소유주나 굵직한 클라이언트들은 꾸미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이어 이제는 막 엄청 풍요롭다 말할 수는 없지만, 가방쯤은 언제든 백화점 갈 시간만 있다면 살 수 있는 존재이기에 더 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도 해줬다.
그 말은 나에 대한 충고나, 경고가 아니었다. 정말 잔잔한 자신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가치가 아닌 왜 가방에 집착했나. 그래 봤자 일주일 짜리 행복인 걸.
지옥철을 탈 때는 메지도 못 할 샤넬. 왜 그것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이 사람처럼 단단해지고 사회에 자리 잡으면 내가 무슨 가방을 드는지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텐데.
사실 그냥 명품이어서 갖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분수에 넘치는 물건을 소유하고 마치 그 분수에 맞는 사람이 되는 기분에 젖었던 건 아닐까?
이런 부끄러움을 짝꿍에게 잔잔히 고백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말하는 우리 대표님도 7만 원짜리를 들고 다니는데 그런 대표님을 수행하는 내가 700만 원짜리를 메고 다니는 건 웃기는 것 같다고.
그런 나를 비웃을 줄 알았다. 짝꿍은 내게 “그래서 네가 행복하면, 그거면 됐지 뭐. 그 사람은 가방이 행복이 아닐 수 있지. 나처럼.” 위로인 듯 아닌 듯 미지근한 위로를 건넸다.
명품 가방, 도대체 내게 어떤 존재일까? 아직도 명확한 답을 찾진 못했고, 대표님과의 일화를 통해 얻은 현타를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