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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럽집 Apr 30. 2020

스페인 코르도바 여행 Ⅱ

여행고픔증 연재 005.  메스키타 - 이슬람 편

멀리 ‘메스키타’가 보이는 풍경


Convivencia
관용이 허용되는 사회



스페인에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세비야 등 유명하고 멋진 도시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도시가 개인적으로 ‘코르도바’라고 생각한다. 코르도바에 가면 이슬람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메스키타(Mezquita-Catedral de Córdoba)’라는 곳이다.


이슬람교와 가톨릭교는 너무도 다르다고 생각해왔고, 그래서인지 도저히 섞여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인도 사람과 영국 사람이 국제결혼한 모습이 더 익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메스키타’라는 곳엔 두 종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을까.


이번 여행 글에서는 약간 ‘탐구생활’이나 ‘현장학습’같이, 메스키타를 둘러보면서 아랍과 유럽이 서로 ‘관용’적으로 대했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보려 한다.




코르도바에 이슬람 사원이 생긴 이유
코르도바 메스키타
메스키타 정원
우뚝 솟아 있는 메스키타 안 대성당


코르도바엔 왜 ‘이슬람 사원’이 생겼을까


‘메스키타’를 얘기할 때 이게 가장 결정적인 질문인 것 같다.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지금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진 않다. 코르도바를 여행하는 사람의 의미 있는 목적지로 이용되고 있을 뿐 종교적인 의미는 이미 퇴색됐다. (그렇지만 너무 멋진 건축물이긴 하다)


코르도바를 두 번 여행하면서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를 단지 ‘관람’했고, 4년이 지나 두 번째 왔을 땐 이 곳의 진정한 의미를 느껴보기 위해 이 곳에 관련된 책을 10권 이상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까지 합치면 스무 권은 될 것 같다.


따분하고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메스키타'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교 건너 멀리 메스키타


8세기. 유럽은 소위 ‘중세 시대’라 불리는 가톨릭 종교의 믿음이 높은 시기이다. 믿음은 강했지만 삶은 그리 윤택하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흑사병과 기근에 시달렸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천문학, 과학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해봤자 인구 1만이 넘지 못한 상황. 그에 반면 아랍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통일 국가를 형성해서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에 이슬람교를 믿는 왕조가 들어선다. 지금으로 치면 오히려 반대겠지만 당시는 분명 기독교(가톨릭)를 믿는 유럽 국가는 못살았고 지식 또한 아랍국가에게 뒤처져 있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기독교 인들에겐 야만인으로만 보였던 아랍인들이 이탈리아 남부, 아프리카 북부를 정복하고 결국 스페인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 서기 711년의 일이다. 그 후 스페인 땅에 8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머물게 된다.


코르도바는 이슬람이 스페인에 들어왔을 때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한 후 수도로 삼은 곳이고, 메스키타도 그때 지은 ‘이슬람 예배당’이다. 당시 코르도바라는 도시에만 인구 50만이 있었다고 하니까 유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번성한 곳이었다.




유럽에서 꽃 피운 이슬람 문화
메스키타 정원 분수대에서


하지만 아무리 발달된 문화라 할지라도 이슬람이 오기 전 코르도바에서 살던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이단’ 종교 일뿐이고, 아랍 사람들은 ‘이방인’ 일뿐이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 즉 ‘무슬림’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무력으로 코르도바를 빼앗았고 ‘지배층’이 되었지만 소수였기 때문에 가톨릭 신앙인들인 ‘서고트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긴 힘들었다.


만약 이때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학살했으면 반발이 심했을 거고, 이슬람 문화는 유럽에서 꽃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콘비벤시아(Convivencia)’즉 ‘관용’을 베풀기로 한다. 기독교는 물론 유대교인들도 함께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랬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는 유럽에서 꽃 피울 수 있었다.




메스키타 실내 디자인 - 이슬람 장식


고대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건축기술을 수용한 이슬람


많은 사람들이 서양문명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알고 있지만 중세의 유럽은 그리스 철학이나 기원전 로마의 다신교 사상을 철저히 짓밟는다. 인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신’만 찬양하고 신께 모든 걸 바쳐야만 한다는 ‘암흑기’에 접어든다. 하지만 그에 반면 무슬림들은 이 모든 걸 수용하고 자신들의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시킨다. 그래서 중세엔 유럽보다 아랍이 더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몇 백 년에 걸쳐 치렀던 ‘십자군 전쟁’은 거의 아랍이 승리한다.


메스키타 실내에 들어가니까 제일 먼저 ‘코린트 식’이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된 기둥을 볼 수 있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로마가 발달시킨 건축술 ‘아치’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이슬람의 아치 형태는 로마와는 약간 변형된 모습이었으며, 낮은 천장을 높게 보이게 하는 ‘이중 아치’로 자신들의 건축술을 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줄무늬’또한 말발굽을 연상시키며 확실히 아랍의 색채를 갖춘 디자인이었다. (원래 유럽에 ‘말(馬)’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탄 ‘기병’으로 구성된 아랍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은 아랍의 상징적 의미였으니 이렇게 디자인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음)



미흐랍(Migrab)


1.6톤의 황금과 핑크색 대리석, 백옥으로 된 인테리어


메스키타가 756년 최초로 만들어져서 이후 200년간 3번의 증축이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엄청나게 고급 재료를 사용했다는 걸 관람하면서 알 수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기도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미흐랍(Migrab)’같은 경우는 동로마제국에게 조공받은 1.6톤의 황금을 사용해 만들었고, 그 밖에도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모두 고급스럽다. 이는 당시의 무슬림들이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을 거라 상상하기 충분했다. 동로마 제국에게 황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건 돈도 많고 힘도 셌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유럽보다 농업기술이 발달되어 있어서 인구도 많고 돈도 많고 그랬을까)


시각디자인과 공간디자인 전공자로서 이런 자그마한 장식 하나하나까지 의미 있게 관람하게 됐었는데, 이런 재료들이 당시 얼마의 가치가 있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작은 패턴 하나하나를 일일이 조각했던 장인들의 예술적인 정신은 경악할 만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력도 기술력이지만 이건 엄청난 ‘신념’이 필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모두는 이집트 사람들이 신을 위해 노예처럼 피라미드를 지었던 정신만큼이나 자신들의 신 ‘알라’를 위한 신념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처음 봤을 땐 단지 ‘이슬람교에 대한 생소함’에 의해 선입견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4년이 지나 다시 여기를 찾아 자세히 보니까 정말 하나하나 온통 멋지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850개 넘는다는 메스키타 내부의 기둥은 마치 ‘숲’같이 느껴진다. 사막지대에서 발원한 이슬람 사람들에겐 오아시스가 천국같이 느껴졌겠으니 물과 그늘을 귀하게 여겼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구조적으로는 과설계된 이 기둥들이 어쩌면 ‘야자나무 숲’을 연출하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코르도바 여행 Ⅲ’에서 계속


원랜 이슬람과 가톨릭 두 종교 다 이 글에 담아보려 했는데 내용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가톨릭은 다음 글에서 이어서 할 계획이다.


8세기 지어진 이슬람 장식도 우수하고 아름답지만, 800년 정도 지나서 16세기에 지은 대성당도 엄청나게 아름답다. 경이롭다고 해야 하나. 16 세기면 이미 ‘고딕 양식’의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고딕과 르네상스 디자인이 합쳐져 있으면서도 안정감과 균형감이 돋보였다.



(‘코르도바 여행 Ⅲ - 여행고픔증 연재 006. 메스키타 - 가톨릭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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