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영 Aug 17. 2021

저는 불을 피우는 물이에요

태생에 관하여

내 태몽은 둘째 고모가 대신 꿔주었다. 동네에 마른 우물이 있었는데, 꿈에서 갑자기 그 우물에 물이 샘솟아 양동이를 들고 물을 가지러 갔다고 했다. 고모는 솟아나는 물을 퍼서, 양동이를 아빠에게 전달해주었다고. 우물에 물이 넘치는 태몽은 재물을 많이 벌어들일 아들이 태어날 꿈이라고 하던데. 내가 아들이 아니라 재물도 없는 걸까. 아니면 물이 넘치던 것까지는 아니어서 예언이 안 맞는 게 당연한가. 그래도 신기한 것은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가 그 당시 운영하던 호프집이 개업 이래 최고 매출을 찍었다고 했다. 평소 매출의 두 배랬나, 세 배랬나. 아빠는 그 이야기를 해주며 내가 복을 끌어오는 애라고, 잘 살 거라고 확신에 차 말했었다.


게다가 나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 마치 태몽이 내 출생의 비밀을 미리 알려준 것만 같다. 재물 벌어들이는 아들 말고, 말 그대로 물이 많은 형상을. 그런데 나는 한겨울, 해가 다 지고 난 뒤에 태어난 물이라 춥고 쓸쓸하다고 그랬다. 물이 얼어 있다고. 음기가 아주 많다고. 나는 여자, 물, 겨울, 저녁으로 이루어진 음기 4콤보를 갖고 태어났다. 미신을 잘 믿는 나는 음기가 탱천한 내가 싫어서 불을 상징하는 빨간색에 집착하기도 했다. 빨간 립스틱, 빨간 속옷, 빨간 원피스를 눈에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심지어는 타투로 태양을 새기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조화를 조금 맞추고 싶었다. 내가 음기가 강해서 우울하고 허무한 거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관계를 욕망하는 것도 결국 양기를 갖고 싶은 거라고 여겼다. 이사할 때는 해가  드는지를 1순위로 보았다. 여름에는 생기롭고 기운이 넘쳤다.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전생에  빚을 갚는 기분으로 살았다. 시들어가는 몸과 마음을 주체할  없었다. 3 겨울, 수능이 끝난 뒤에  자리는 라디에이터 앞이었다.  앞에 바짝 의자를 붙여놓고 수면 양말을 신은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친구가 내게 “그러다  죽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얼어 죽는 것보다야 낫지.” 하고 답했다.


그러나 음기를 중화시킴으로써 개운을 하고자 했던 나의 집착은 어느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양기 넘치는 남자를 만나 기분 좀 펴보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태몽이나 사주의 문제도 물론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혈액형별 성격이나 MBTI 같은 것밖에 안되었다. 달릴 때면 달리는 속도에 반비례해 생각의 유속은 느려졌다. 나중에는 숨쉬기도 힘들어서 생각의 무화(無化)가 일어났다.


달리기는 30분도 안 되게 했는데 달리고 난 후에 두세 시간 정도는 말끔한 정신으로 씻거나 밥을 먹고 책을 보다 잠에 들 수 있었다. 내일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절망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다만 내일도 달려야지, 내일은 조금 더 오래 뛰어봐야지,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뛰어봐야지, 같은 기대를 스스로에게 걸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더 잘하고 싶어서 금연을 하고 코어운동을 시작했다. 확실히 근력운동을 하고 난 뒤에는 기록이 살짝 더 좋았다. 다음 달에 살 러닝화와 니삭스를 미리 담아 놓고, 긴 레깅스가 더워서 숏팬츠를 사는 일이 즐거웠다.


게다가 주4회 재택근무를 하니 치솟던 우울감과 반비례하던 삶의 질도 좋아졌다. 회사 사람들이 애틋해질 때는 비디오 안 켠 줌 미팅으로 주 1회 정도 만날 때인 것 같다. 통근과 대면에 소비되던 체력과 시간을 아끼니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명상을 다시 시작하면서 명상 크루를 만들었다. 다른 세계로 회피하고 싶어서 넷플릭스에 코를 박고 있는 시간이 줄었다.


바꿀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옷차림이나 입술 색깔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나와는 다르게 불을 잔뜩 품고 있는 남자나 만나는 게 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편협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태생이 뭐라고. 태생은 태생이고 어떻게 사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태어난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태어난 곳에서 더 멀리 더 반대로 달리는 것도 너무 재밌다. 나는 내가 이렇게 잘 달리는 사람인 줄도, 이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


인생에 재밌는 게 별로 없어서 더 이상 크게 감동받거나 마음이 콩닥거리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배반되었다. 명상 크루 중 조가 알려준 대로 사람마다 명상 상태에 진입했을 때 집중되는 차크라가 다르다는 사실은 요 근래 내 마음을 가장 들뜨게 했다. 내가 느끼는 차크라는 언제나 미간에 위치한 6번 차크라다. 모든 가능성을 현실에서 이루어내는 힘, 영성과 예지력을 주관하는 차크라. 그래서 가끔 꿈대로 이루어지나? 이런 생각들로 오늘도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명상하러 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무의식의 성(城)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