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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n 05. 2024

6. 위장술과 로드무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시를 써서 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어떤 상인지, 무슨 대회였는지 기억 나진 않지만 그 시에는 시계와 시간이 나왔다. 시계와 시간은 서로 붙어있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낯설게 하기1)’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시는 낯선 오브제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심연을 이야기하는 장르다. 어떤 대상을 떠올렸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다른 대상이나 단어는 배제하는 것이 좋다. 시는 언제나 균열과 충격을 향해야 한다.


시는 확언하는 장르가 아니다. 시는 언제나 모호하게 말하는 장르다. 그러나 시 쓰는 사람의 태도가 모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향할 곳을 알고 있다. 향할 곳, 있어야 할 곳, 경유할 곳, 벗어나야 하는 곳, 도망치는 곳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시는 은닉하는 장르다. 사물과 사물을 경유하며 시는 향해야 할 곳으로 향한다. 시는 확언 없이 독자를 꼭 어디론가 데려간다. 확언이 언제나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확언 없이도 독자는 자신이 도착해버린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내가 찾는지도 모르고 찾아 헤맸던 곳이라는 확신을.


시는 타자의 장르다. 시는 자신 안의 타자를 바라보는 장르다. 시는 자신 안의 타자를 발견하는 장르다. 시는 결국 타자가 되어보는 장르다. 죽은 자가 화자인 시를 읽을 때 시인과 독자는 모두 한 번 이상 죽게 된다. 가상의 죽음을 체험하며 삶과 실존을 바라본다. 아픈 자가 화자인 시를 읽을 때 시인과 독자는 모두 한 번 이상 그와 같이 아프게 된다. 가상의 아픔을 체험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본다. 시는 타자를 자신에게로 포획2)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타자로의 여정을 감행하는 로드무비다.


시를 처음으로 배우고 쓴 지 10년이 넘었다. 시에 대해 이렇게나 오래 골몰하였다니. 그런데도 시는 내게서 자꾸 도망친다. 시를 쫓아가는 일이 좋지만은 않다. 언젠가는 시가 내 손 안에 단단히 붙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쓴 시를 보며 항상 시가 여기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인식이 사라진 것은 최근이다. 요즘은 내가 쓴 시가 사람인 척하는 귀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때로는 귀신인 척하는 사람 같다. 그것은 되고자 하는 것이 완벽히 되지 못한 채 위장술만 늘어간다.


시를 쓴다고 해서 그 어떤 인정이나 보상을 받은 적 없지만 시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 묻지 않아도 나는 이 자문을 놓은 적 없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나를 영원히 불만족하는 인간이기 때문일수도3), 아직 되어보지 못한 낯선 타자가 너무 많아서일 수도, 찾는지도 모르고 헤매는지도 몰랐지만 결국 도착해야 할 곳이 아직 남아있어서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시와 잠시 멀어지고 싶었던 적은 있어도 영영 헤어지고 싶었던 적은 없다. 아직도 나는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낯선 시가, 영영 모르고 지냈던 타자의 단면을 손끝으로 쓰다듬어 볼 수 있는 시가, 여전히 좋다.






1) 러시아의 형식주의자인 쉬클로프스키는 문학의 언어는 일상 언어와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상 언어는 상투적이고 규격화돼 있습니다. 쉽고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수수께끼처럼 낯익은 것을 낯설게 표현합니다, <[주기중의 사진, 그리고 거짓말] ‘낯설게 하기’의 미학>, 주기중, 이코노미스트, Apr 29, 2018


2) 이후 레비나스는 전체주의 폭력의 근원을 살핌으로써 그 폭력을 넘어설 길을 찾는 데 철학적 사유를 바쳤는데, 그 사유가 응집된 저작이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이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의 존재론을 전체주의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전통 존재론은 그 ‘사유하는 나’ 바깥의 모든 것을 나의 인식으로 포섭하고 흡수한다. 서구 존재론은 내가 만든 전체 체계 안으로 모든 타자를 포획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전체성의 철학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멸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동일성의 존재론이 전체주의 폭력을 산출했다. 레비나스는 이 존재론에 맞서 ‘형이상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때의 형이상학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열린 사유를 뜻한다. 존재론이 끊임없이 나로 돌아오는 자기회귀적 사유라면 형이상학은 나의 한계를 넘어 내가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 자기초월적 사유다. 형이상학이 사유하는 타자는 무한을 간직한 존재다. 이 무한을 사유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동일성에서 풀려나 타자와 윤리적으로 만날 수 있다, <[책&생각] ‘전체성의 존재론’ 넘어 ‘타자의 무한성’으로>, 고명섭, 한겨레, May 19, 2023


3) 사람들은 대단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도 같은 일을 계속하는 이에게, 의아하다는 듯, 혹은 용하다는 듯 그 동력이 무엇인지 묻는다. 큰 그릇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는가? 라는 질문이 아마 숨어 있을 것이다. 벌써 만들었어야 하지 않아? 라는 질책처럼 들릴 수도 있고, 할 만큼 했다는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중략) 큰 욕망은 사람을 치열하게 하지만 꾸준하게 하지는 못한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은 화난 사람과 같아서 뜨겁지만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 열심히 하게는 하지만 한결같이 하게는 하지 못한다. 큰 욕망은 사람을 화급하게 하고 성마르게 한다. 큰 욕망의 사람은 노력한 만큼의 결실이 나타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진득하게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욕망의 사람이 아니다. (중략) 꾸준함의 비밀은 어제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다. 꾸준함은 성향이 아니라 행위의 반복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성향이라면, 행위의 반복에 의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만회하려는 마음이 동기다. 물론 다시 한다고 더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 좋아졌다고 해서 만족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보장이 다시, 더, 계속하기의 동력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 동력이다, <이 낯선 지상에서>, 10화, 이승우, 주간 문학동네, Mar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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