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보다 더 깊은 마음.
마루와 함께 한지 벌써 12년째이다.
마루를 처음 데리고 왔을 무렵은
반려견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자취방에도 보통은
반려견과 함께 살 수 없었다.
반려견과 함께 하기 위해선
집주인에게도, 주변 이웃들에게도
어렵게 허락을 받아야 키울 수 있었다.
그때도 이동장에 넣으면
대중교통을 이용 가능하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갑게 보지 않았다.
반려견과 함께 한다는 것은
꽤 많은 눈치를 보고,
꽤 많은 양보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루와 함께
많은 곳을 가고 싶었다.
새로운 자취방을 구할 때도
마루와 함께 할 수 있는
오피스텔 위주로 골랐다.
또 근처에 동물병원이 있는지,
산책할 곳은 있는지 살펴보는게 먼저였다.
그땐 그게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데려온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마음.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집엔
강아지가 항상 있었다.
아빠도, 동생도 길가의 떠도는
유기견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왔기때문이다.
그러나 유기견들은 상처를 치료받고,
배를 조금 채우면 항상 우리집을
뛰쳐 나가려 했었다.
어린 나와 동생, 그리고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은
뛰쳐나가는 유기견들을
붙잡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때때로 전단지도 붙여보고,
유기견을 데려왔던 장소에 찾아가봐도
한 번 집을 나간 강아지들은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더 안전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던 것 같다.
그래서 마루를 데려오기 전,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나의 상황에 대해 들여다봤다.
내가 끝까지 데려온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인지,
그정도의 비용도 지불 할 수 있는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가질 수 있는지.
그땐 내가 이 작은 생명체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받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루와의 12년.
상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스스로 고립되려고 했을 때,
마루가 내 곁에 있어줬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진짜 나를 지우려고 했을 때,
마루는 있는 그대로의 나만을 좋아해줬다.
한없이 가라앉는 우울감에
푹 빠지려 했을 때,
마루가 있어서 작게라도 웃을 수 있었다.
아마, 반려견이든 반려묘든 반려식물이든
뭐든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그 아이들로부터
위로받는 시간들이 더 많다는 것을.
마루와의 12년은 나에게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