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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마도당근 Nov 13. 2022

마이구미

 누구나가 그렇듯 모두가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상황에 맞게 가면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일을 할 때만 해도 당장 세어보니 12개 정도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선임간호사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2년차 레지던트, 내일까지만 볼 환자, 앞으로 몇 달은 더 봐야하는 보호자까지. 

 

 상처 나 겁으로 생긴 가면도 있고 오히려 더 자유로이 표현하기 위해 꺼내는 가면도 있다. 간혹 이기심에 두껍게 쓴 가면으로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죽음이 나에게는 그저 숙제같은 일이어야 하는 순간에 말이다. 이미 숨을 거둔 아빠의 손을 붙잡고 울부짓는 사춘기 소녀의 눈물에 그저 적당히 덜 냉정해 보일 정도로의 위로를 해주어야 한다. 주어진 8시간 동안 11명의 환자를 모두 커버하는 3년차 간호사이기 때문에.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에서 끝나야 하기 때문에. 이 환자가 정리되면 그 뒤에 올 환자를 맞이해야 하기 때문에, 이 소녀가 눈물을 멈추어야 내가 일을 할 수 있다. 아버지를 잃은 딸의 슬픔보다 고인이 장례식장으로 옮겨갈 시간을 예상하고 이송 상황실에 전화를 하는 게 더 중요할 때에는, 다 외면하고 바스락거리는 내 이불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다. 죽음의 순간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충분한 위로를 해주지 못하고 퇴근을 할 때면 가면 탓을 해버리는 내가 추악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내가 탓을 하며 합리화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면이 있기에 살 수 있다.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이 껍데기를 훌렁 벗어낼 때에 내 피로와 죄책감까지 같이 덜어낼 수 있거든. 껍데기 속에 있는 나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진 나는 엽기적이게도 그저 양손에 마이구미를 쥐여주길 기다리는 4살 정도의 미취학 아동이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으로 사주든 그건 알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만 살 수 있다. 

적당히 쫄깃해서 잇몸이 근질거린다. 

슬며시 웃음 지어지는 정도의 당도를 가지고 있다. 

맛있다고 서너 개 나누어주고는 착한 일 했으니 

언제든 또 먹고 싶을 때 윙크만 하면 한 봉투 더 쟁취할 수 있다. 

조금 속상할 때에 이 단 맛이 다시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정도로 끝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사줬으니 나도 잊지 않고 갚아야 한다. 

다 먹으면 매운 치약으로 양치를 해야 한다. 

다시 먹으려면 그만큼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한다. 

옆 사람에게 서너 개 나누어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하지도 못하고 생각할 능력이 없는, 가지 반찬도 남기지 않고 숫자나 겨우 셀 줄 알아도 예쁨만 받는 그런 아이. 복잡하고 머리 아픈 건 생각 안 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고 맛있는 것만 생각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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