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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어쩌나, 그녀와 이 비를 또 기다리고 있어

by 범수

대학 2학년까지만 해도 예술이 가지는 힘을 인정하지 못했다.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놈이 그래도 됐었나 싶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보면 자주 등장하지 않는가.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들으며 과거의 풍경을 떠올리고 감상에 젖는 인물들. 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영화 속 인물 같은 사람이 있다. 그 형은 연인과 함께 본 영화나 들은 노래를 통해 상대방을 기억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별은 찾아오는 법. 박인환 시인도 <세월이 가면>에서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형은 이별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잃어 갔다. 그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면 그녀가 떠올라 싫다는 게 이유였다.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형은 새로운 만남을 가질 텐데, 옛날은 떠난 자리에 남아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참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도 예술의 울림이라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기억력을 믿는다. 장범준의 <봄비>만 들으면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 머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2017년 봄, 새벽녘, 학교 뒤편에 길게 자리한 벚꽃길, 새벽답지 않게 가벼운 공기, 희미하게 차오르는 술기운, 가로등에 비친 연분홍 벚꽃잎 따위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 길을 혼자 걸었는지 둘이 걸었는지, 또 웃으며 걸었는지 울며 걸었는지조차 모른다. 이 말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냥' 떠오른다.

노래를 듣고 특정한 과거가 떠오른다는 것은 따뜻하면서도 서글픈 일이다. 먼저,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참 풋풋하고 좋다. 하지만 동시에, 이유 모를 향수가 나를 덮쳐 감상적으로 되어 버린다. 왜 그때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치 기억 속 희미해지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머언 뱃사람처럼.

다시 들어보니 가사도 참 애틋하다. 화자는 그녀를 잊어 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봄비가 내릴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그대와 함께이던 봄날이 떠오른다. 그렇게 생각의 가지를 이어가다 문득 깨닫는다. "아, 어쩌나, 그녀와 이 비를 또 기다리고 있어."

내가 느끼는 2017년의 벚꽃길이 화자에게는 봄비인가 보다. 이제는 예술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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