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감정이 복잡할수록 더 바쁘게
늘 잔잔한 시간이 나를 더 흔들리게 했다.
가만히 있으면 감정이 올라왔고,
감정이 올라오면 끝없는 불안이 시작됐다.
무거운 마음은 금세 바닥까지 가라앉았고
그럴 때마다,
’ 개복치 같은 인생 사라져 버릴까 ‘생각도 했다.
마음속에서 이유 모를 초조함이 물결처럼 차올라,
그냥 숨만 쉬고 있는 나조차 버거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이 제일 무서웠다.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시간이 한참 흘러 있었다.
휴대폰 알림도 울리지 않고, 창밖도 조용한데
내 마음만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심장은 쿵 내려앉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나는 나를 스스로 괴롭히는 방식에 익숙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깊이 생각했고,
하나의 감정에 오래 머물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상상했고,
그 상상은 언제나 가장 나쁜 결말로 향했다.
꼭 그렇게 될 것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기대는 늘 어긋나고,
어긋나 버린 상황은 날 더 불안하고 힘들게 했다.
가장 나쁜 결말은 오히려 그 상황을 더 가볍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기대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그런데 난 왜 이렇게까지 긍정을 무서워하게 된 걸까.
‘잘될 거야’라는 말이
왜 그렇게 무겁게 들렸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예전에 친구한테 털어놨더니
“넌 왜 항상 최악만 생각해?”라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때는 대답을 못 했다.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런 걸 ‘재앙화 사고’라고 한다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사고방식에 이름이 붙는 게 신기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설명해 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안도됐다.
그날 밤은 평소보다 덜 외로웠다.
마치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을 하나 찾은 기분이었다.
재앙화 사고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만큼, 이건 오래된 내 감정의 습관이었다.
이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내가 안전하다고 믿는 방식은 늘 같은 자리로
날 데려다 놓았다.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데,
그걸 입 밖에 꺼내거나 그냥 느끼기만 해도
나한텐 너무 벅찰 것만 같았다.
나는 늘 그 앞에서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예전에 남편에게 말한 적도 있다.
“나 요즘 좀 힘들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힘드네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더 허전해졌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한테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말해도 어차피 누구도 나를 안아줄 여유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나를 바쁘게
만들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이 복잡해질수록
스스로를 더 분주하게 만들었다.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로 시간을 채웠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잠시 쉬어줄 거라 믿었다.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계획을 세우고, 청소를 하고,
괜히 휴대폰을 붙잡고, 쇼핑을 했다.
드라마에 감정을 이입하고,
나 아닌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냈다.
손에 잡히는 건 많았지만
마음속엔 하나도 남는 게 없었다.
결국 그날 하루도 그냥 버티는 걸로 끝났다.
감정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피하는 쪽이
익숙했다.
느끼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마주하는 것보다 외면하는 게 훨씬 쉬웠다.
그게 나의 감정 회피 방식이었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는 일상의 모습 속에서
조용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감정을 억누르는 것.
겉으론 멀쩡히 웃고, 말도 잘하고, 남들 눈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속은 늘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감정을 피해서 열심히 움직여도
그 모든 걸 하면서도 내 생각은 지치지도 않고
자꾸만 따라왔다.
도망가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굴레랄까.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하고,
짜증을 내고, 날카로워지고,
식욕을 잃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조용히 내 옆에 와서 물었다.
“엄마, 화났어?”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바쁘게 사는 건 이겨내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회복이 되진 않았다.
감정을 잠시 잊게는 해줬지만,
결국은 또 돌아와 마주하게 되었다.
피한 만큼 더 크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감정은 피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언제나 내 안에서,
내가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여전히
조용한 순간이 싫고, 텅 빈 시간이 불편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멈춰 있는 나를 잠깐 바라본다.
그게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믿어본다.
언젠가 잔잔한 시간이 두렵지 않고
그저 쉬어가는 시간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