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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아픈 기억

by 마음의여백

목이 아프다.


가을인데 기온이 차갑게 떨어졌다.

방심하고 목이 드러난 브이넥 셔츠에 가벼운 복장으로 외출을 했다.


아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 같다.

유독 편도선이 자주 부어 음식을 삼키기조차 힘들 때가 많았다.


그 시절 시골에는 의원이 한 곳뿐이었다. 그곳은 주로 넘어지거나 다쳐서 외상 치료를 받으러 갔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그곳이 무면허 의료 행위로 적발되어 유일했던 의원마저 없어졌다.


당시에는 민간요법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면 소재지에 부은 목을 치료해 주는 여자분이 있었다.

집안의 서열상 할머니 다음으로 목소리가 크셨던 큰 어머니는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가셨다.


그 집의 치료법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 같은 ‘대꼬쟁이’에 기름을 발라 화롯불에 달군 뒤, 부은 편도선을 그대로 지지는 것이었다. 마당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루에는 치료받는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살이 타는 듯 냄새가 진동했다.


내 차례가 되어,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하고 뜨거운 대나무로 목의 양쪽을 지질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참을 수 없어 비명을 비르고 몸부림을 쳐도, 어른들이 내 손과 머리를 꽉 붙들었다.


불로 지지고 나서 며칠 동안은 밥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었기에, 그 이후에도 또 목이 부어서 더 무섭게 치료하는 곳을 찾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몸이 안 좋아졌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보건소에 마음씨 좋고 형 같은 공중보건의 선생님이 오셨다. 건강이 안 좋아져 몇 주간 학교를 쉴 때도 있었는데, 선생님은 청진기로 가슴을 진단하더니 광주의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치료비가 많이 들 것 같아 머뭇거렸다.


당시 광주에는 적십자사 앞에서 무료 진료를 해주는 이동 버스가 있었다. 그곳에 가서 오랫동안 줄을 서서 검진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공중보건의 선생님은 자기가 다녔던 대학병원으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여러 고급 장비로 나를 검진해 주셨는데, 그것도 무료로, 혼자서 나를 봐주셨다. 선생님은 몇 년 뒤 보건소를 떠나셔서 뵙지 못했다. 좋은 의술을 많이 펼치시고 지금은 은퇴하셨을 거다. 참 고마우신 분이다.

그때 진작 큰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았다면,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마음이 오랫동안 아팠다.


올해 100세 되신 큰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치료받게 한 게 마음에 걸리셨던지 이번 추석에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셨다.

나는 큰 어머니가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으시도록 “지금은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옆에 있던 사촌 형과 형수님은 어릴 때 너무 힘들었겠다며 안쓰러워하셨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시골엔 병원도 없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정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편도선이 약한 편이다.

목을 따뜻이 감싸야했는데

계절의 변화를 가볍게 생각했다.

브이넥 셔츠로 인한 목의 통증에 어린 날의 아픈 기억이 스쳐 지난다.

삶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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