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나 자신에게 안부를 묻듯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최근 제 서재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던 책 한 권이 있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교과서라 불리는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이다.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 제 마음속엔 문장보다 더 깊은 '삶의 골조'가 남았다.
낯선 세계에서 발견한 가장 익숙한 나
맥키는 말한다. "전형적인 이야기는 집 안에 머무르지만, 원형적인 이야기는 여행한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 스토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이야기는 아주 희귀하고 독특한 설정 속에서도, 결국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갈등을 건드린다.
안산 구봉산의 해솔길을 걸으며 석양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쓰던 날이나, 구순을 가까운 아버지가 여전히 논둑의 풀을 베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저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풍경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의 흐름'과 '부모의 사랑'이라는 인류 공통의 원형이 숨어 있었다.
맥키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제가 에세이를 쓰는 이유는 단순히 일상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삶이라는 낯선 세계로 들어가 그 깊은 곳에 숨은 '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기대와 결과 사이, 그 '간극'이 주는 생동감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야기의 실체'에 대한 정의였다. 맥키는 이야기의 동력이 언어가 아니라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 있다고 설명한다. 주인공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행동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돌아올 때 생기는 그 틈새가 바로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지점이라는 것.
돌이켜보면 제 삶도 수많은 간극의 연속이었다. 몇 해 전 가을, 아내와 함께 영국 여행을 꿈꾸며 설렜지만 결국 다음을 기약해야 했던 아쉬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웠던 가족과의 부산과 일본 여행.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그 지점들이 오히려 제 삶의 에세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삶의 리듬은 평온과 도전 사이를 오가며 활력을 얻는다는 맥키의 통찰은, 삶을 조급해하지 않고 '삶의 리듬' 자체를 즐기게 하는 큰 위안이 되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작가의 유일한 책임
맥키는 작가에게 단 한 가지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가란 일상에서는 남에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작품을 만들 때만큼은 진실을 말하는 존재"라는 대목에선 가슴이 서늘해졌다.
여전히 복잡한 마음을 안고 사는 저의 솔직한 자성(自省), 슬픔을 억누르기보다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 그것이 제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에 담아야 할 '권위'임을 배웠다. 세련된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사건들을 얼마나 정직하게 직조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연필을 깎으며
『스토리』는 시나리오 작법서였지만, 저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철학서로 읽혔다.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욕망을 추구할 것인지, 그리고 마주하는 시련들을 어떻게 '주도적인 아이디어'로 승화시킬 것인지 고민하게 해 주었다.
좋은 결말이란 "필연적이지만 예상 밖이어야 한다"라고 한다. 제 인생의 다음 장이 어떻게 펼쳐질지 저 또한 다 알 수 없지만, 로버트 맥키가 일러준 대로 삶의 이중성을 긍정하며 뚜벅뚜벅 써 내려가 보려 한다. 비록 투박한 일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보편적인 진실을 길어 올리는 '삶의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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