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르네상스를 간혹 '시대'로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중세-르네상스-바로크 등 이런 식인데 이것은 '시대'와 '사조'를 혼용하는 것으로 '시대'의 기준으로 바로잡으면 중세-근세-근대이며, 미술사의 '사조' 기준은 고딕-르네상스-바로크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대'나 '사조'라는 것은 후대 역사가들이 특정 시기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붙인 '해석의 틀'로써, 고딕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의 구분 또한 지역과 분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점진적이고 중첩적이므로 미술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사이 걸쳐 있는 '근세'에 발생한 당시 유럽인들의 시대적 사유의 결과물로써, 14C~17C에 걸쳐 발전한 시대정신의 변혁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적 사유의 시작이 왜 이탈리아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배경부터 짚어보자.
당시 이탈리아는 프랑스, 독일 등의 서유럽과는 정치체계가 달라, 장원 경제에 기반한 봉건제가 뿌리내리지 않고 공화정을 기반으로 한 도시국가 체제가 일찍이 자리 잡았다. 이것은 지중해의 도시국가들이 일찍부터 상업 경제가 발전했다는 의미로 특히, 12C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수혜(물자 수송, 선진 중동 문명의 서유럽 유입 등)를 지중해의 도시국가들이 고스란히 가져감으로써 르네상스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공화정:정치 세력의 중심이 왕이 아닌 귀족과 시민 계급의 합의로 운영되는 정치 체계
십자군의 주요 이동 경로
한편, 당시 많은 수도원과 성직자들은 부를 축적하며 세속화되어, 이러한 부패를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청빈한 삶과 전도 사명을 회복코자 하는 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탁발수도회'라 불렀다. 상업과 교역의 발달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대중과 단절된 외딴곳의 교회나 수도원보다는 도시의 하층민과 함께하는 전도 사명이 이들의 신앙적 삶이었으나 빈곤함이 오래되면서 본래의 취지가 퇴색되었고 이들 또한 세속화되기에 이른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원인 중에 하나인 이 세속화의 과정을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상인과 귀족들 거의 대부분은 그 부를 이용해 고리대금업을 겸업하였다. 이 고리대금업은 당시 성경에서 절대 해서는 안될 금기로서 죄악시되었으며, 어길 경우 성찬식 참여와 교회 묘지 매장 등을 금했고 때로는 파문과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고리대금업을 하던 상인, 귀족들에게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두려움에 빠지게 하여 속죄할 방법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이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탁발수도회'였던 것이다. 이들의 장기적인 생활고를 후원과 헌금 혹은 교회 헌납으로 해결해 줌으로써 속죄의 대가로 천국행을 보장받았으니 가장 성스러운 욕구와 가장 세속적인 욕구의 절묘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도 by 보티첼리/1490년 경(좌), 환전상을 쫓아내는 그리스도 by 조토/1305년 경(우)
14C 초 피렌체의 대표적인 고리대금업자가 바로 전 장에서 다룬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헌납한 '엔리코 스크로베니'였으며, 이 예배당의 내부를 벽화로 장식한 미술가가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로 불리는 '조토'였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속죄의 분위기 속에서 지어진 수많은 소규모의 예배당들이 결국 르네상스의 자양분이 되었으니 이 또한 놀라운 역사적 반전이 아닌가 싶다.
르네상스가 움트기 시작한 14C는 흑사병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전염병의 유럽 최초 발생처가 지중해의 시칠리아로 알려져 있고 베네치아, 제노바 등 이탈리아 전역으로 급속히 번져 이들 도시국가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유럽 인구의 약 50%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은 영혼의 변화도 경험해야 했다. 흑사병 대처에 무능했던 귀족과 교회의 권위와 신뢰가 크게 무너졌고, 질병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해법이 아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신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인간 중심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흑사병은 유럽인을 엄격한 종교적인 삶에서 벗어나 개성과 이성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게 하여 오히려 르네상스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 발병 지역과 전파 과정/1348년~1353년
불편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있기는 하지만 르네상스의 시작은 고대 로마의 DNA를 물려받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부터 비롯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이렇게 시작된 르네상스의 정신은 흑사병의 전파 과정과 유사하게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근대 유럽의 지적, 문화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