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절정의 르네상스, 16세기 초 독일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게 만든 해부학에 관한 지식, 고전(클래식)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이다. 알프스 북쪽에 사는 사람들 중 학문이나 문화 부흥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혜와 보물들이 발견되는 이탈리아를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했던 알프스 북쪽의 군주들과 귀족들은 자신의 건축가와 미술가들에게 소위 '이탈리아 스타일'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알프스 북쪽의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에서 입수한 그림에서 인물의 형태나 제스처를 빌려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반면에 이탈리아 거장들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히 이해하고 그 유용성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을 만들기 원했던 소수의 미술가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훗날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프레히트 뒤러'였다. '뒤러'는 헝가리에서 독일 뉘른베르크로 이주한 금속세공가의 아들로서 특히, 목판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초기 걸작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이다.
요한계시록은 최후 심판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을 묘사한 성경의 예언록으로 지금껏 이처럼 무시무시한 광경과 함께 힘 있고 강렬하게 시각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대량 생산이 가능한 판화의 특성으로 이 작품들은 삽화집으로 제작되어 삽시간에 유럽으로 퍼져나가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이러한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당시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폭발한 교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5세기 초, 북유럽의 '얀 반 에이크'가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표현한 이래로 '뒤러'보다 더 끈기 있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모사한 미술가는 없었다.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 중에도 유명한 작품들이 있지만, 습작의 목적보다는 유화, 동판화, 목판화로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이후 판화를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뒤러'는 북유럽 전통의 세밀한 사실주의에 르네상스의 비례와 원근법을 결합하여 독일 미술을 르네상스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과 이론을 접하며 고전 미술의 과학적 기법을 연구하였고 수학, 자연과학 등 인문주의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연구와 활동들은 당시 '그림 그리는 장인' 수준의 인식에 머물렀던 독일 미술을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북부 유럽의 회화에서는 예수를 정면으로 묘사하며 대칭적 구도로 그리곤 하였는데, '뒤러'는 그의 3번째 <자화상>을 이와 유사한 예수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예수의 창조적 능력을 상징하는 오른손의 제스처와 그의 손을 유사하게 표현하여 신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재능을 강조하고 신성한 창조자라는 상징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즉, 예술가로서의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자 예술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당시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등 개인적인 신념과 예술적 성찰이 결합된 종교화도 다수 그려, 미술이 단순한 종교적 장식물이 아닌 사회적·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인체비례론', '측량법과 원근법' 등을 저술하여 과학적인 미술 이론을 연구하고 체계화시킨 학자의 면모도 보여준 그야말로 북유럽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써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막시밀리엥 황제는 여러 야심 찬 계획에 뒤러를 고용했다.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은 마침대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속물근성을 타파하게 된 것이다."_P 350 / Story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