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르네상스를 넘어, 16세기 중후반
종교 개혁에 의해 초래된 신교도들의 성상에 대한 우상 숭배 논란은 북유럽 미술이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반면에 앞장에서 언급한 '엘 그레코'의 주요 활동 지역인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특히, '엘 그레코'는 궁정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매너리즘적인 왜곡된 인체 표현과 강렬한 색채가 당시 스페인 미술계의 일반적인 취향(르네상스적인)과 맞지 않아 스페인 미술계의 주류에서는 완전히 인정받지는 못했고,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에 따른 사진기의 발명으로 촬영된 사진과 삽화는 확충된 철도망을 따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스페인 미술을 유럽 전역에 소개하는 중요한 매체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사진기의 발명은 회화가 단순한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색채, 감정, 개성 표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만들어 살길을 찾아야 했던 화가들은 표현주의와 인상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견된 '엘 그레코'의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감정 표현들은 그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영감을 주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당시의 르네상스적 사실주의와는 다른 독창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는 지상의 장례식과 천상의 영광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것이 특징으로 왜곡된 인물의 형태와 신비로운 색감, 그리고 강렬한 명암 대비를 통해 신비주의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극적인 종교적 감동을 준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톨레도의 풍경을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묘사한 <톨레도 전경>은 어두운 구름과 독특한 색채 사용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등장인물이 없이 순수하게 풍경에만 몰두한 그의 유일한 그림이다.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새로운 수도로 정해지고 구 수도가 된 톨레도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초록색, 푸른색, 청회색이 만들어낸 격렬한 붓질과 드라마틱한 구름이 자아내는 기묘한 불안감은 위기에 찬 도시의 풍경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전경에 위치한 자연 요소들은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어 도시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표현하고, 어둡도 암울한 구름과 독특한 색채의 사용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작가의 감정을 반영하여 후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엘 그레코'는 16세기 르네상스에서 17세기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화가로,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당시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후대에 들어서면서 표현주의를 비롯한 현대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화가들인 반 고흐, 피카소, 고갱 등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한, 그는 사진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감정과 개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회화를 발전시켰으며, 극적인 색채와 형태의 왜곡, 강렬한 감정 표현은 현대 미술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오늘날 그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혁신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후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와 색채를 비판하고 그의 그림을 기분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_P374 / Story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