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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5 - 전화통화

by 로그아웃

전화통화

어느 날 나는 그녀와 소통하기 위해 문자 대신 전화 통화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통화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감정을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고, 이모티콘이나 문자로는 느낄 수 없는 포괄적 정보가 제공되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통화는 메시지와 비교할 때 훨씬 직접적이고 깊이 있는 소통이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타이밍이었다.


"잠깐만요! 제가 지금 회의 중인데요. 금방 전화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회의 때문에 통화를 이어갈 수 없었던 은하가 그 뒤 마음에 걸려 이번엔 자신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회의에 참석 중이라 부재중이었다. 회의를 마친 내가 그녀의 부재중 통화 메시지를 확인한 후 즉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통화 중이거나 부재중 상태였다. 다시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나는 회의 중이거나 바빠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내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린 것은 자동 응답이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


"삐 소리 후에는 통화 요금이 지불됩니다.“


기계음은 나를 신속히 통화 종료버튼을 누르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신속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바로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빴다. 나는 그녀가 보낸 부재중 메시지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냥 문자로 보낼 걸 그랬나? 괜히 바쁜 시간에 전화를 걸었나?

하지만 고민도 잠시, 거래처에서 온 카톡 메시지가 불을 뿜고 있었다. 동시에 상사의 지시로 또 다른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얼마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급히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은하씨! 반가워요!“


그 순간, 옆에서 부장이 나를 불렀다.


"뭐해? 회의 가야지!“


"아, 네!“


나는 손으로 전화기를 막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계속 어긋났고,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은하님! 제가 전화 드릴께요!“


내가 미안함을 표시하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도 미팅이 시작돼서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진 채 내가 전화를 마치려 하자, 그녀가 말했다.


"어... 괜찮아요! 바로 전화 안 주셔도 돼요! 제가 대신 다시 할게요!“


그녀의 말에는 자신이 다시 전화를 걸기 전 까지는 전화를 하지 말아 달라는 뉘앙스도 포함되었다. 그녀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뭔가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통화를 이어가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느낀 듯했다.

핑퐁 대화는 이제야 멈췄다. 바쁜 현실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에 앞으로는 통화를 자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 회의 중일 때 울리는 진동을 기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자동 메시지를 전송하곤 했다. 그 후에는 약속된 문자 메시지가 보내졌다.


『회의 중입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또는 『문자로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이에는 점차 통화를 자제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갔다. 이제 전화는 정말 급한 상황이나 혹은 주말에 이용하는 소통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담 없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각자의 시간대에 맞춰 핑퐁 대화로 서로의 정보를 교류해 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했다.


은하도 바쁜 나에게 전화해서 미안했고, 나도 바쁜 그녀에게 온전히 답하지 못해 미안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미안한 존재가 되었다. 미안한 존재에게는 자주 연락하지 않는 것이 예의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미안함은 우리 관계 속에 기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서로에게 미안했다.

전화 통화는 이제 오직 만나는 날 도착을 확인하기 위한 직접적인 통신 수단으로 축소되었다. 더 이상 감정을 나누거나 긴 대화를 이어가는 매개체가 아닌, 약속된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기 위한 도구 말이다. 그 외의 모든 의사전달은 카톡으로 대체되었다.


현재의 디지털 사회는 수많은 가상 대화자들과 동시에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환경으로 변했다. 바쁜 일상은 자연스러운 숙명처럼 여겨졌다.


그후에도 우리는 종종 퇴근 후 바쁜 시간을 쪼개 만나곤 했지만, 카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까톡!“


"지이이익~~“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업무와 광고의 홍수 속에서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고 숫자를 지우지 않으면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은하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우리는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했다. 전화를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을 때면 이번에는 상대방이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우리의 일상은 정보의 전달과 답장이란 끊임없는 교차로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했으며 존재로서의 감정은 점차 그 무게에 짓눌려 지치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를 떠나면 그녀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열어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봤고,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나는 즉시 스마트폰을 열었다. 혼자가 된 순간, 누구나 예외 없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혼자 있을 때 스마트폰은 자석처럼 손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차 한 잔을 마시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카톡을 열어보았다. 여러 단체 채팅방에서 빨간 숫자가 피를 쏟아냈다. 대충 메시지를 훑으며 숫자들을 지웠다. 숫자가 남아 있으면 불안감이 들었고, 숫자를 지워야만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로 남은 은하와의 마지막 대화방이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고, 그 안에 있던 마지막 메시지조차 낡은 기억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다시 열어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1’이란 숫자는 그녀와 나 사이의 마지막 끈처럼 느껴졌다. 마치 대화방 창을 닫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마저 닫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몇 차례 알림이 울렸지만,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와의 대화방에 남은 ‘1’은 가상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돼서야 그녀의 창에서 1의 흔적이 지워진 것을 확인했을 때 비로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이 장치는 소통엔 관심이 없었다. 마치 삶을 옭아매는 올가미 같았고, 코에 걸려 있는 고삐나 범죄자를 속박하는 전자팔찌와도 다를 바 없었다.


카톡 시스템의 도입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통제당했다. 퇴근 후 육체적으로는 자유로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얽매여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카톡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곧 암묵적 고립을 뜻한다. 소통을 강요받으면서도, 진정한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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