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익스피어의 『오델로』 -
나는 책을 좋아한다. 어쩌면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요즘은 소설도 심리 분야도 아닌 그림책을 수집하듯 자꾸 사들이는 버릇이 생겼다.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를 계속하는 편인데 쌓이는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 이미 내 것처럼 든든하기까지 하다. 가격이 부담스러워 몇 권은 슬며시 빼기도 하지만 기분 좋게 누르는 버릇은 여전하다. 다른 쇼핑에서는 고심 끝에 결제하는 나의 소비성향을 봐도 책에 대해서만은 인심이 후한 편이다. 아마도 이런 습관은 오래전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새 학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봄인 걸로 기억한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교문 앞에 새로 생긴 작은 서점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책을 살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주로 참고서를 사러 가는 친구들과 시내 서점에 들러 본 적이 다인데 그날은 혼자서 가는 것이라 조금 떨렸다. 큰 서점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학생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있어 눈여겨보았다. 거기에 젊은 주인이 친절하다는 소문은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서점은 그날따라 손님이 없었다. 주인은 책 정리로 바쁜 것 같아 조용히 구경을 시작했다. 소문대로 눈짓으로만 맞이했지 뭘 사러 왔느냐고 다그치지 않아 안심되었다. 앞쪽엔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지만 내 관심은 거기가 아니었다.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어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려준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 『주홍글씨』가 보였다. 지금도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기억하는 책이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인지 나중에 책으로 읽은 내용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잘 버무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을 서점에서 보니 반가웠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넘겨 읽다가 또 다른 책을 꺼내어 훑어보는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나 싶다. 책에서 나는 냄새도, 손님이 없는 한가로움도, 가지런히 꽂혀있는 많은 책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단지 책을 사러 갔을 뿐일 텐데 여유를 부리며 한참이나 어물쩡거렸는가 보다.
혼자 온 학생이 유심히 책은 살피는데 선뜻 고르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한 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학생, 얼마 가져왔어?”
“3천 원이요.”
“여기 있는 책들은 대부분 5천 원 이상인데.”
서점 주인의 5천 원이라는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어떻게 딱 3천 원만 가지고 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거나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당시의 책값을 알 길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책을 사겠다는 마음이었으면 더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야 했다.
적은 돈으로 책을 사러 올 생각을 했냐는 비웃음을 당할 것 같아 창피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었다. 하지만 서점 주인은 오히려 내게 적당한 책을 골라 주고 싶어 물었다는 표정을 연신 지었다. 그러면서 책장으로 다가가 내가 미처 살펴보지 않았던 책꽂이 위쪽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셰익스피어를 아냐고 물었다.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작가라는 정도는 알고 있기에 반응을 보였다. 겉표지가 짙고 어두운 연둣빛 책을 보여주며 읽어보았냐고 또 묻는 것이다. 읽어보기는커녕 처음 들어보는 책이었다. 그제야 주인은 본론을 말해주었다.
“이 책 가격이 딱 3천 원이야.”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오델로』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라는 설명과 희곡이지만 재미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주인은 책을 내게 넘겼다. 가진 돈과 딱 맞는 가격이니 나 또한 기분 좋게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설레었던 가슴이 책값으로 철렁 내려앉아 온 힘을 쭉 빠지게 하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책을 받는 순간은 짜릿함마저 느꼈다. 건네준 젊은 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도 내심 자신의 참견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손에 넣은 책을 빨리 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책가방을 뒤로하고 곧바로 책장을 넘겼다.
지금은 이 책의 대강 줄거리만 기억나고 세세한 것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주인공 오델로의 우유부단함과 어리석음으로 부인과 주변인들이 죽거나 떠난다는 내용이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의심이 질투로 변한 바보 같은 왕. 결국 비극으로 끝나버려 어이없던 마무리. 당시의 어린 나는 그런 비극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서점 주인의 말대로 처음이었던 희곡을 어렵지 않게 읽은 기억은 또렷한 편이다.
3천 원으로 알게 된 책의 세계는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주저 없이 가게 만든 원동력이다. 자주 또는 일부러라도 서점을 들르거나 책방만 둘러보는 여행도 즐긴다. 빈손으로 나오는 법이 없는 걸 보면 책을 사는 재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