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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Apr 14. 2023

 08.  딱 3천 원이야

 '오델로'를 떠올리며 1

 나는 책을 좋아한다하지만 읽는 것보다 어쩌면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요즘은 소설도 심리분야도 아닌 그림책을 수집하듯 자꾸 사들이는 버릇이 생겼다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를 계속하는 편인데 쌓이는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책인 것처럼 든든하기까지 하다결재를 하려고 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아 슬며시 빼는 책도 생기지만 기분 좋게 누르는 버릇은 여전하다인터넷쇼핑을 즐겨하지 않는 나의 소비성향을 살펴보아도 책에 대해서만은 후한 인심을 드러내고 있다아마도 이런 습관은 오래전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지금처럼 새 학년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는 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학교를 마치자마자 교문 앞에 새로 생긴 작은 서점으로 향했다우여곡절 끝에 책을 살 돈이 생겼으니 이날만을 기다렸다주로 참고서를 사러 가는 친구들과 읍내 서점에 들러 본 적이 다인데 오늘은 혼자서 가는 것이라 이상하게 떨렸다큰 서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학생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있어 눈여겨보았다거기에 젊은 주인이 친절하다는 소문은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서점은 그날따라 손님이 없었다. 주인은 책정리로 바쁜 것 같아 조용히 구경을 시작했다. 소문대로 눈짓으로만 맞이했지 뭘 사러 왔느냐고 다그치지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앞쪽엔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가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지만 내 관심은 거기가 아니었으므로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려준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 '주홍글씨'가 보였다. 지금도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기억하는 책이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인지 나중에 책으로 읽은 내용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잘 버무려져 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을 서점에서 보니 반가웠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넘겨 읽다가 또 다른 책을 꺼내어 훑어보는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나 싶다. 책에서 나는 냄새도, 손님이 없는 한가로움도,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단지 책을 사러 갔을 뿐일 텐데 괜한 여유를 부리며 한참이나 어물쩡거렸는가 보다.


 혼자 온 학생이 유심히 책은 살피지만 선뜻 고르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한 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마를 가져왔는지 물어보며 다가왔다. 


"학생, 얼마 가져왔어?"

"3천 원이요."

“여기 있는 책들은 대부분 5천 원 이상인데.”


 서점 주인의 5천 원이라는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도 남았다어떻게 딱 3천 원만 가지고 갈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거나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당시의 책값을 알 길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책을 사겠다는 마음이었으면 더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야 했다그런 돈으로 책을 사러 올 생각을 했냐는 비웃음을 당할까 봐 창피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었다그러나 주인은 오히려 내게 적당한 책을 골라 주고 싶어 물었다는 표정을 연신 짓는 것이 아닌가.

   

by 오솔길

 그러면서 주인은 책장으로 다가가 내가 미처 살펴보지 않았던 위쪽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로 다가와 셰익스피어를 아냐고 물었다.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작가라는 정도는 알고 있기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겉표지가 짙고 어두운 연둣빛 책을 보여주며 읽어보았냐고 또 묻는 것이다. 읽어 보기는커녕 처음 들어보는 책이었다. 그제야 주인은 본론을 말해주었다.

  

 “이 책 가격이 딱 3천 원이야.”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오델로이다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라는 설명과 희곡이지만 재미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주인은 그 책을 내게 넘겼다내가 가진 돈과 딱 맞는 가격이니 나 또한 기분 좋게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아침부터 설레었던 가슴이 책 값으로 철렁 내려앉아 온 힘을 쭉 빠지게 하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책을 받는 순간은 짜릿함마저 느꼈다건네준 젊은 주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그도 내심 자신의 참견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그런 사소한 일이 뭘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하겠지만 내겐 그날의 일이 사진처럼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일이다.



소소한 책그림 후기 ;   졸업한 학교 근처를 일부러 들렸다. 서점이 있던 길은 넓은 도로로 변했을 뿐 그대로 있는데 그 서점만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오늘의 책
『오델로』, 셰익스피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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