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
3월 말은 아버지 기일이다.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오랫동안 미워했다. “남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넌 대학을 포기해라.”라는 아버지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왜 아버지가 생각나는 걸까.
아버지는 농부였다. 복숭아 과수원을 비롯해 논농사와 밭농사까지 지었다. 철모를 때는 우리 집이 부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실망감이 컸다. 속 빈 강정처럼 부모님이 일하는 곳은 다 남의 땅이었다. 갈수록 아버지의 농사 실력도 의심스러웠다. 논에서 일하시는 이웃 아저씨들의 까맣게 그을린 어깨를 보고는 흰 피부에 키만 큰 아버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치챘다. 겉모습만 봐도 아버지가 초보 농부임을. 그나마 복숭아나무를 심고 수확하면서 우리 집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는 유난히 병충해에 약하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나무다. 가지치기, 거름주기, 종이봉투 감싸기, 약 뿌리기 등. 수확의 기쁨을 얻기까지 자식 돌보듯이 가꿔야 한다. 초보 농부였던 아버지는 실패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나무에 매달렸다. 나무랑 살려고 시골로 내려온 사람 같았다.
복숭아는 더위가 시작할 무렵, ‘사자도’라는 품종을 먼저 수확한다. 온 가족이 달려들어 복숭아를 따느라 바빴다. 긴 옷을 입어도 껄끄러운 털이 늘 신경 쓰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창방’이라는 품종을 따야 했다. ‘기도백도’를 마지막으로 수확하고 나면 어느덧 여름이 지나갔다. 부모님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렸으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았다.
과수원 농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이국땅에서 값싼 과일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복숭아는 그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봄마다 실컷 보던 분홍 꽃들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부로부터의 보상을 받고, 우리 집을 비롯한 복숭아 농가들은 나무를 베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비닐하우스 농사가 자리 잡았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면 부자가 될 줄 알았다. 추운 겨울에 딸기를 재배할 정도로 내 눈에는 놀라운 시설이었다. 겨울만이 아니라 1년 내내 그곳에서는 어떤 작물이든지 기를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는 부모님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전보다 더 힘든 노동을 강요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구운 고구마를 먹으며 신문을 읽던 농한기의 쉼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재배하게 된 멜론은 뜨거운 여름을 나야 수확하는 과일이다. 그러니 비닐하우스 안의 온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매달려 순을 따고 열매를 솎아내도 자라는 작물을 따라가지 못했다. 밤이 되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돼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일을 도와주면서 느낀 것은 이러다가 부모님이 쓰러질 것 같았다. 결국 아버지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그 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없는 고향 집은 적막하다. 아버지의 손길이 멈춘 담장은 곧 내려앉아 쓰러질 것 같다. 낡은 담장 뒤편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볼품없이 키만 커서 아버지가 심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다부지고 빠르게 일하는 법은 없어도 집주변을 항상 깔끔하게 정리하셨다. 나무 한 그루도 허투루 심었을 리가 없다.
엉성한 나무라고 하찮게 여겼는데 분홍 꽃이 예쁘게 폈다. 화사하고 눈부시게 허물어진 담장을 감싸고 있어 기특했다. 혹시 복숭아나무인가? 꽃이 지고 난 뒤 앙증맞은 작은 열매가 다닥다닥 매달려 있어 보니 개복숭아 열매였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먹고 버린 복숭아 씨앗에서 싹이 나 자란 것이다. 익지도 않는 열매가 그대로 땅에 떨어져도 아깝다며 따거나 줍는 이도 없다. 보면 볼수록 아버지처럼 홀쭉하고 앙상하다. 태풍이라도 불면 부러질 듯 약해 보이는데 의외로 담을 감싸며 잘 버티고 있다.
늘 자신을 위로해 주는 나무에게 자신이 쓴 책을 바친다고 하는 이가 있다. 나무를 사랑하는 표현치고는 최고의 말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나무 의사’라는 직업을 소개하고 30년 넘게 나무를 돌보면서 얻은 지혜를 글로 쓴 저자 우종영. 그는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라는 책을 통해 무엇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내는 것이 나무라고 칭송한다.
나는 아직 그가 느끼는 것처럼 대할 만한 나무는 없다. 그만큼 나무에게 베푼 적도 얻은 것도 없다. 나무와 이런 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그래서 저자의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나무에게서 얻은 것이 없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나무가 바로 복숭아나무다.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며 매일 보던 것이니만큼 익숙하다. 그나마 아는 척을 할 정도로 조금 친한 편이다. 그래서 나무는 물론 시장이나 마트에 놓인 복숭아만 봐도 가꾸고 거둔 누군가의 손길을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 코를 들이대고 특유의 달콤한 향을 맡으면서 과일 평도 한다. 맛이 좋은 복숭아만 골라 담는 내게 남편이 옛날 과수원집 딸답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다가 먹고 나면 내 실력에 다들 감탄한다. 병충해에 죽을까, 장마에 익은 과실이 떨어질까를 고심하며 키운 나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던 살림의 원천. 돈과 먹을 것을 모두 내어준 존재였다.
자식 같은 복숭아나무를 벨 수밖에 없던 아버지. 자식들 때문에 또는 경제적 가치를 따져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무가 쓰러지고 난 후 자신도 세월을 이길 수 없어 차츰 젊음에서 멀어지셨다. 복숭아나무는 아버지 그 자신이 되어 자신을 가르치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게 해 주었다. 뒤늦게나마 아버지가 그리워 오랫동안 꽃을 바라보았다. 꽃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처럼….
‘아버지, 미워해서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