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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Jun 08. 2023

백년손님의 손맛

  생일도 아닌데 미역국을 또 끓인다.  

    

  죽을 것 같다는 엄마는 키조개를 넣은 미역국을 먹은 후에 정말 기적처럼 일어나셨다. 특별한 비법이랄 것도 없는 평범한 음식이 때로는 생각지 못한 효능을 보여 신기하다. 남편은 기뻐하며 이번 기회에 음식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당연히 찬성이야.” 그가 만들어 준 매운탕은 횟집에서 먹어본 것보다 훨씬 깊은 맛이 난다. 그래서 생선요리는 내 손에서 벗어난 영역이 된 지 오래되었고 주말이면 그가 요리하는 음식을 기다릴 정도다.


  “입맛이 없어 금방 죽을 것 같어.” 

  듣는 자식에게는 덜컥 겁이 나는 말이지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을 것 같어.”라고 또 한다. 가끔은 제대로 써먹는 말이라서 부랴부랴 병원부터 예약하고 서둘러 내려간 적도 있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목소리만 들어도 큰일이 벌어진 줄 알고 직장에 조퇴 신청까지 해서 급히 내려갔다. 긴장하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독대에 앉아있는 엄마. 반가운 얼굴에 미소만 가득하다.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매번 엄마에게 속는 것 같아 찜찜했다.


  “입맛이 없어.” 다시 엄마의 호출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이번에는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거기다 몸이 무겁게 짓누르더니 쑤시고 아팠다. ‘다른 집 엄마는 혼자서도 잘 지내던데…’ 내 몸도 마음처럼 지쳤는가 보다. 하지만 혼자 지내는 엄마의 외로움은 거리와 관계없이 멀리 있는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끈이 보이지 않아도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어 모른 척할 수가 없다. 그래서 외면하기 어렵다.


  남편이 냉동실에 넣어둔 키조개를 찾는다. 그는 지난번의 기적 같은 음식의 효능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더욱 의기충천하다. 그는 자기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 장모님이 회복됐다고 믿는다. 하지만 굳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그가 정성으로 만든 음식이 자식보다 나은 효과를 보인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남편은 우선 냉장고에 가서 얼려둔 키조개와 절여서 둔 우럭과 조기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다. 생선은 시어머니가 특별히 당신의 큰아들에게 주려고 일부러 챙겨준 것이다. 보자마자 절대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런데도 그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간장꽃게장마저 넣는다. “이상하게 장모님은 비린 것을 참 좋아해.”라는 말을 덤으로 보탠다.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까지 있는 사람이다.


  생각보다 엄마 상태가 심각했다. 핼쑥한 얼굴에 온몸이 파스투성이다. 아마 집에 있는 파스라고 생긴 것들을 몽땅 찾아내 온몸에 붙인 것 같다.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 보였다. 비가 오는 날에 혼자 옥수수와 깨를 심었던 일이 무리였을 것이다. 힘이 들어 몸살은 나고 제대로 된 음식은 못 드신 모양이다. 안 아픈 곳이 없어 죽겠다는 엄마는 그 상황에도 나와 사위를 보고 미안하다며 일어난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걸 보니 속이 상했다. 그런 내 마음과 다르게 퉁명한 소리가 저절로 나간다. “일 좀 그만 하세요!” 


  나는 결사적으로 엄마에게 매달렸다.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답을 듣고 싶어 조용히 시작한 말씨름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도 그렇지만 엄마도 지지 않았다. 촌에서 일이라도 해야지 못하게 하면 어떡하냐며 우겼다. 서로 팽팽했고 우리 둘 다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문틈으로 음식 냄새가 들어왔다. 고소한 들기름과 어우러진 바다향이 솔솔 풍겼다. 방에서 티격태격 씨름하는 동안 부엌에서는 바지런한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고소하게 퍼지는 냄새는 내 위장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나일 수도, 엄마일 수도, 아니면 둘 다일 수 있다. 들기름에 키조개를 볶은 후 미역을 넣어 푹 끓인 냄새가 틀림없다. 이내 냄비와 그릇이 식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음식 냄새는 뇌를 자극하더니 온 신경을 파고든다. 이전 기억을 그대로 살려내 혀가 음식 맛을 느낀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준다. 내 입안은 어느새 침이 고였다. 다행히 아픈 엄마의 후각 또한 정상이었다. 배가 고프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부엌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를 분명 느끼고 있었다. “그만하자!”라는 엄마의 반응이 드디어 나왔다. 나는 풀이 나든 말든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키조개 국물부터 들이켰다. 

  “백년손님을 너무 부려 먹어 미안하네.”

  몇 술 뜨더니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비웠다. 되찾은 입맛에 엄마는 사위가 만든 다른 음식들도 맛보며 연신 칭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위의 얼굴에 미소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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