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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an 24. 2024

30년을  정리 중입니다

평소에 꿈꿨던 일이다. 진작에 마음먹은 이라 미련 없이 계획대로 신청했고 지금은 공문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지막에 근무한 자리는 아무래도 남다르. 원래 평범하고 성실하게 근무했을 뿐인데도 작은 흉들이 곳곳에 있어 뒷모습은 아름다운 자리로 만들고 싶었다. 말끔하게 제자리로 돌러놓는 게 마지막 할 일 같았다. 

 

쓰레기봉투와 큰 가방을 가지고 오후시간에 교실과 복도 그리고 분리수거함을 오갔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동료가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청소하는 이유와 퇴직한다는 소식에  아쉬워다. 창틀에 쌓인 먼지부터 아이들 사물함 속까지 그리고 쓰다 남긴 학습자료는 다시 분류해서 보관해 두고 못쓰는 물건은 다 버렸다.


이제 중요한 정리가 남았는데 아직도 따라붙어 이번 기회에 미련 없이 털어내야만 한다. 가늠할 수 없는 책임감, 공적인 신분에 눌린 답답함, 민원 때문에 닫힌 열정, 그리고 찌꺼기로 남은 감정까지 탈탈 털어 한다. 머문 교실의 묵은 때는 몸을 쓰면 되지만 마음 정리는 숨에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 다.


매서운 눈보라가 덜컹대며 유리창을 때려도 정리 중인 나는 땀이 난다. 거기에 얼마 전부터 세월과 함께 잘 견뎌내 어깨가 오십견이 왔는지 아프기만 다. 그래도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조금은 놀랐다.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으려면 때로는 가장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그나마 용기 내서 퇴직을 신청한 것도 나를 위한 가장 이기적인 결정이다. 퇴직까지 남은 기간이 있다며 만류는 지만 우물 같은 에서 이젠 나갈 때가 되었다. 안정적인 직장으로는 아주 괜찮지만 대신  안에 있어야만 그것도 가능하다. 자꾸 하늘만 바라나에게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사람은 그런 나를 칭찬한다.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다. 승진은 포기했고 특별히 공부한 분야도 그럭저럭이지 만한 손기술 하나 없는 나에게는 분수 넘치는 말이다. '어쩜 그런 생각을 했어? 쉬워 보여도 어려운 일이야!'라면서 추켜세우니 잔뜩 움츠렸던 어깨와 더불어 눈과 입까지 들썩들썩 춤을 다. 칭찬에는 참 약해진다. 학기말 업무가 폭주하는 12월도 이런 것쯤은 우습다며 마음만은 야들야들해졌다.

 

마음이 가벼우니 몸이 졸라대듯 손이 빨라진다. 손 빠르게 일하는 스타일이라 잽싸게 하는 편인데 올해는 마지막이 아닌가. 해야 할 업무는 느긋이, 우리 반 아이들과의 활동은 여유만만하게 일부러 느린 거북이가 되었다. 나로서는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귀한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손이 많이 가서 나중으로 미루고 버려도 괜찮다고 여긴 자료들이다. 쓰레기봉투를 옆에 끼고 종이 한 장 한 장을 일일이 들여다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사랑해요'몇 번이나 고백하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쪽지, 꼬질꼬질 때 묻은 종이 카네이션, 더 젊고 더 예쁜 모습으로 그려서 나 같지 않은 그림, 다양한 학급경영자료와 낡은 사진, 그리고 누렇게 바랜 방석에 시선이 멈춘다.


새해도 아닌붉고 뜨거운 해가 갑자기 가슴속에 타올라 서서히 따뜻해진. 눈물보다 진한 뜨거운 감동이 치민다. 소중한 추억을 아무렇지 않게 버릴 뻔하다니 거북이처럼 천천히 하기를 다. 보관이 편한 클리어파일에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넣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얀 방석이다. 생각할수록 많은 사연들이 한 코씩 뜨개질한 사이로 보인다. 어린아이 보다 때로는 더 어린 부모들이 다. 자기 욕심에 자식이 먼저라 미처 다른 아이들은 제쳐둔 이들이다. 물론 이해되 그럴 수도 있지만 갈수록 당연시하는 무례함은 걱정이다. 그런 나를 응원하며 한 땀 씩 코바늘로 떠 주었.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피곤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럴 때마다 쉴만한 곳은 의자뿐인데 앉기만 해도 피로를 풀어준다. 엉덩이가 닿는 순간, 응원해 준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쓰러질 것 같다는 말은 어느새 엄살이 되고 다시 씩씩해져 나게 일하게 했다.


원하던 대로 새 주인이 와도 놀랄 만큼 깨끗해졌다. 정리된 이 교실에서 시작하는 후배가 나보다 즐겁게 생활하기를 바라면서 방석이 든 가방을 들고 교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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