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진 Jul 31. 2023

이걸 버렸다면 후회할 뻔

  '어, 이게 여기 있네!'

  앞장이 뜯긴 채 서랍장에 보관된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닳고 닳은 책 모서리는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손때가 묻고 얼룩져서 오래 묵은 것처럼 보였다. 테이프로 붙였던 자국이 누렇게 변색되어 떼어 보려고 해도 들러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남편은 버리지 못하는 병이 있다. 쌓여가는 물건을 보면서 다 가진 자의 흐뭇한 표정까지 짓는다. 그럴수록 내속은 더 부글부글 끓는. 이젠 이사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다만 그게 책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라 다행이라고 여기고 다. 이 문제로 툭 터놓고 이야기를 해봤는데 내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한다.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자의 부탁이고, 그중에 내 것도 있으니 그 제안에는 동의하였다.


  그런 와중에 부탁의 범위를 넘어서서 서랍장 안까지 침범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일반 책에 비해 두세 배 정도로 큰 사이즈에 무겁기도 다. 여행 때마다 가지고 다니며 요긴하게 쓰기는 했다. 하지만 GPS으로 실시간 교통 안내를 해주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찾는다고 버리기는커녕 보관을 하다니. 그렇다고 이런 고물이 보물이 되겠느냐고.


  이를 알아본 둘째 아이가 다가왔다. 우리는 장마철마다 방문입구에 쌓아놓은 책들 쓰러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한숨 지며 쳐다보던 사이. 내심 응원군을 찾은 것 같아 욕심을 부렸다. 일부러 목소리를 키우고 그동안 참아오던 불만을 말했다. 

  '작은방이며 베란다에 쌓이는 책이 지저분하지도 않으냐. 책꽂이에 있는 책이야 어쩔 수는 없지만 구석구석에 벽돌처럼 올라가는 저 책들이라도 정리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요즘에 누가 지도를 본다고. 아직도 안 버리셨어요?"

  "버리기는. 이게 어떤 책인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할 거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지도책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바라던 방향과는 다른 느낌이다. 둘은 지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책을 뒤적이거나 지도상의 지역을 가리키며 진지하다. 오랜만에 내려온 아들과 고물 같은 책 속에서 무얼 찾으려고 저럴까.

by 오솔길


  둘째가 혼자서도 걸어 다닐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떠날 만큼의 시간과 돈이 조금 생기자 남편을 졸랐다. 주말이면 부라 부랴 짐을 챙기고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가까운 곳부터 다녔다. 나와 달리 계획형인 남편은 여행지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그의 빼곡한 일정은 여행이 아니라 문화유적지 탐사와 비슷하다. 초행길에 아이들과 같이 움직이다 보면 돌아오는 시간이 매번 늦었다. 적어도 뒤돌아오는 길만큼은 헤매지 않으려노력하는데도 어두워지면 길은 희미해져  보이지 않았다.


   마침 주변을 지나가는 주민이라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초지종을 말하면 대개 손가락으로 가르쳐준다. 그렇다고 가리킨 곳이 원하던 곳은 아니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갈림길이라도 나오면 서로 제 생각이 옳다고 다투는 날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길수록 지치고 피곤해서 다시는 가지 말자고 서로 투덜대다가도 또다시 짐을 싸게 된다. 지도가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았다.


  그날도 귀가가 늦은 날이었다. 밤길이라 IC로 들어가는 길을 놓쳤던 것 같다. 먼 길을 돌아가지 않으려면 고속도로가 가장 빠른 경로였다. 차를 멈추고 보조등아래서 지도를 살피며 잘못된 이유를 알아냈다. 그런 경험은 지리감각을 배우는 공부가 되었고 우리는 길을 보는 안목이 점점 늘었다.


  하지만 그 후 내비게이션의 등장은 놀라은 변화를 가져왔다. 굳이 1박을 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 당일로 다니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편리한 기능 때문에 지도책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뒷좌석으로 밀려났고 점점 거추장스러워져 나중에는 트렁크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혹시 여기 안동에서 도산서원에 간 것은 생각나니?"

  "그럼 하회마을이나 월명교는?"

  "설마 월명교 입구에서 먹었던 헛제삿밥이나 간고등어구이는 생각나지? 네가 맛있다고 몇 번이나 그랬는데."


  고개만 흔들뿐 모르겠다 아들은 마지막에는 제가 그랬어요? 라며 오히려 묻는다. 우리는 기억상실에 걸린 아들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이것저것을 물어가며 애를 쓰는 보호자처럼 굴었다. 꼭 기억해 주기를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아들 기억 속에 그때의 시간과 추억들이 다 사라질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질문에 괜한 염려를 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물어물어 맛집으로 소문난 찜닭집을 갔는데 큰 시장인 것 같았어요. 배는 고픈데 그 집에 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우린 기다릴 수 없었. 2층에 있는 다른 식당으로 올라가서 찜닭을 시켰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고3 때 먹고 싶다고 해서 다시 갔잖아요. 엄마아빠, 생각나시죠?"


  같은 여행지를 두고 서로 다른 경험을 풀어놓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런 모습은 낯설지가 않다. 우리는 늘 여행 중에 하고 싶은 것이, 가고 싶은 곳이 달랐다. 점심메뉴를 정하려고 해도 먹고 싶은 것들이 다들 유난했으니까. 그래도 그런 일로 다툰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합의는 제대로 했던 모양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끼고돌던 지도책이 필요없게 되었다고 내팽개치고 금세 잊어버렸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버리지 못하는 남편덕에 희미해진 가족들의 추억이 다시 모아졌다. 그가 공을 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고물 같은 책의 가치를 우리는 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의 쓸모를 논했던 일이 부끄러워진다. 

  


소소한 책그림 후기 ;  지금도 어딜 가면 안내지도부터 찾는다. 대개 휴게소나 관공서에 비치되어 있는데 여행지, 맛집, 숙소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 편리하다. 그래도 마을 길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지도책을 가지고 다녔던 때가 더 재미있었다.


  오늘의 책
『전국도로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3단 옷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