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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Aug 29. 2023

22.  우리 집안의 해방일지

  "어머니,  좀 숨겨주세요. 잡히면 죽습니다."

  늦은 밤, 갑자기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숨겨달라고 하는 이가 있다. 목숨이 걸린 다급한 일이니 놀란 기색조차 문밖으로 새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아무도 모르는 곳, 감쪽같이 몸을 숨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고심 끝에 안방에 앉아 천장을 가리켰고 가족들의 입단속을 위해 함구령을 내린다.


 드라마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에게는 네 분의 삼촌이 계시는데 저 이야기 속의 인물 아버지의 막내삼촌이다. 결혼을 해서 부인과 돌이 지난 첫째 아이가 있고 곧 태어날 예정인 둘째까지 둔 그를 삼촌대신 작은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러니까 내게는 막내 작은할아버지다.



  

 그날, 부모님이 큰집에서 돌아온 시각은 자정이 넘었을 것이다. 일부러 기다린 것은 아닌데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중이었다.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는데 내 귀가 점점 예민해지고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날이 자신의 제삿날인 인물과 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잠을 달아나게 했다.


  아버지는 더듬더듬 기억을 찾는 것 같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주로 궁금한 걸 묻는 엄마에게 띄엄띄엄 풀어내는 대화형식으로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잠귀 밝은 딸이 엿듣는 줄도 모르고 는 바람에 알게 된 우리 가족의 아픈 사연이다.



 시골이지만 보기 드물게 공부를 좀 했다는 이가 근처에 살았는데 작은아버지는 그를 자주 만나고 또 잘 따랐다. 그쯤에 전쟁이 일어났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다른 마을에서 벌어졌다. 바로 그 현장에 작은아버지가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앞서 말한 것처럼 집안으로 쫓기듯이 들어와서 숨겨달라고 한 사람은 바로 작은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안방 위의 천장이 그나마 당장으로는 최적의 장소여서 자신의 막내아들을 올라가게 했다. 그리고 곧이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망친 사람을 당장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작은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가족 중의 두 사람을 인질로 잡았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나에게는 할아버지)와 큰형(나에게는 큰아버지)이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을 방 안에서 지켜보았다.

 

  "그놈을 내놓지 않으면 장자와 장손의 목숨은 없다!"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꿈쩍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말로는 안 되겠는지 방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안을 샅샅이 확인하고 광과 헛간을 뒤졌다. 그런 행동만으로도 가족들은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때 속수무책으로 그걸 바라보 할머니에게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천장에서 들렸다.

 "어머니, 일본에 계신 형님에게 내일 갑니다. 제발 오늘 하루만 숨겨주세요."


 겁을 주고 위협을 했음에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 이번에는 회유를 해왔. 협박보다는 어루만지고 살살 달래는 것이 더 통한 것일까? 잡혀가도 죽이지는 않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할머니는 철석같이 믿었다. 잡혀간 두 명의 자식까지 모두 돌려준다는 말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그만 막내아들이 숨은 곳을 가리키고 말았.


  "저는 이제 죽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끌려가신 게 내가 본 작은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철석같이 믿었던 약속은 하루도 안 걸려 지켜지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은 시신이라도 찾으러 다니셨는데 아무렇게나 버려진 주검을 구덩이에서 건져왔다. 풀려난 자식이나 가족들은 목놓아 울지도 못하고 할머니 얼굴만 쳐다보았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내셨다. 잠시나마 몰래 듣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더 듣고 싶었지만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나고 조용해졌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돼야 가보는 큰집에는 돌아가신 어른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갓을  할아버지와 정장차림에 안경을 쓴 작은할아버지들. 혼례식에 온 하객들까지 흑백사진 속의 인물들은 근엄하다 못해 경직된 채 나를 바라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다들 웃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진사가 '김치'하며 찍는 재주가 없거나 웃으면 복이 달아난다는 출처도 없는 이야기를 믿은 것 같다. 그나마 혼례식 앞줄에 서있는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멀리 있던 친척들이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집안얘기를 듣게 된다. 자랑할 만한 인물은 없을 것인데 한참 동안 떠드는 분은 있다. 잘 새겨듣지 않아서 그런가? 그 작은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다.


 그래도 그분은 기억난다. 쪽진 머리에 정면을 응시하 다부진 입 주위로 주름만 쪼글쪼글한 할머니.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바람 잘 날 없이 부침을 겪은 증조할머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어깨를 펴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던 눈빛만은 예리할 정도이다. 


     

by 오솔길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아버지진심을 마주한다. 다소 무거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며 재미있게 이끈다. 그래서 하루종일 손을 떼지 못하며 읽은 책이 '아버지의 해방일지'이다.


 덕분에 우연히 들었던 우리 가족의 아픔이 같이 떠올랐다. 아무도 궁금해하는 이가 없어서 꺼내볼 생각을 못했다. 나만 알고 있는 슬픈 유산 같아서 잊고 싶었는데 잊히지 않았다. 버려도 괜찮았고 더더욱 간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아버지의 유산처럼 내게도 생생하다. 



소소한 책그림 후기 ; 검은색으로 뒤덮인 아버지 자전거는 크고 무거웠다. 그런데도 그걸 타보겠다고 연습하는 바람에 숱하게 넘어졌다.

  오늘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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