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놀이와 친구들이 있는 곳. 땀을 흘려도 맘껏 떠들어도 아무도 혼내지 않는 곳. 어릴 때는 주로 마을 안쪽에 있던 큰 공터에서 놀았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찜하면 게임 시작인데 어린 나는 늘 뒤로 밀렸다. 동네 언니가 내 차례라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생각해 보면 놀이터는 갈증과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들이 모였다. 동시에 자신과 타인을 알아가고 배우는 공간이었다.
둘째를 보면 어릴 때의 내 모습 그대로다. 외출하는 낌새만 나도 벌떡 일어나 신발부터 찾는다. 현관 밖의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동차 소리에 호기심이 한번 발동하면 반드시 나가야 했다. 특히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작은 발로 뒤뚱거리며 돌진했다. 신기한 듯 버스를 쳐다보고 개와 고양이를 만지려고 어지간히 애를 썼다. 매일 집을 나가겠다고 떼를 쓰면 말릴 수도 없다. 난 매번 녹초가 되었다.
역시 놀이터만 한 곳이 없다. 진작부터 찾지 않은 걸 후회했다. 온몸이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될 정도로 더러워도 괜찮았다. 그늘에 앉아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곳. 하루 종일 집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 내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가 그런 곳이었다. 다행히 둘째도 또래 친구랑 노는 게 즐거워 보였다. 혼자서 멋쩍게 앉아있는 엄마와 달리 쉽게 어울렸다. 놀이터는 어느덧 아침밥을 먹고 나면 출근하듯이 둘이 손을 잡고 가는 장소가 되었다. 나도 자주 만나는 이들과 자연스럽게 아파트 동호수를 물어가며 어울렸다.
그쯤에 준이 엄마와 가까이 지냈다. 제일 먼저 놀이터에 나가는 우리 집 둘째와 그다음으로 달려오는 파워에너지 준이가 맺어준 인연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지만 특유의 붙임성으로 ‘언니’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서 걱정이 많은 여린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쏘다니는 것은 우리 아이도 만만치 않다며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나와 그녀는 금세 친해졌다.
겨울이 되면 놀이터의 풍경은 달라진다. 좋아하던 미끄럼틀은 갑자기 돌변한 사람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워진다. 둘째와 나는 냉정해진 시소를 오르내리고 그네를 흔들어도 추웠다. 그런 우리를 준이네가 먼저 초대했다. 현관문을 들어서며 느껴지는 온기가 준이 엄마를 닮아 따뜻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 나는 더 가까워졌고 자주 만났다.
아이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차츰 서로의 장난감을 탐내더니 다툼이 잦았다. 그때마다 눈에 띄는 준이의 행동. 조심스럽지만 짐작이 가는 문제가 느껴졌다. 망설였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모로서 그걸 모르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이해만 해도 단체 생활이나 친구 관계를 원만히 하는 걸 직업상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정작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으로 상처가 되고 관계만 틀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결국 난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다른 엄마들을 만났다. 그들은 은근슬쩍 비밀을 말하듯 내게 속삭였다.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아무 때나 찾아오고 느닷없이 전화가 올 거라고. 마냥 받아주면 지치고 말 거라고. 그래서 자신들은 일부러 피하고 있으니 잘 처신하라는 내용이다.
준이 엄마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경우 없이 행동할 리 없는데. 말하는 이들과 듣는 나 그리고 준이 엄마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며 알던 사이다. 그동안 크게 다툰 적 없이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뒷담화가 잦아지면 진실은 묻히고 사실에 가깝도록 변질이 된다. 엄마들의 입을 통해 수군거리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소문이 진짜처럼 놀이터를 떠돌았다. 그와 반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묻혀갔다.
마침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모처럼 갖는 휴식을 위해 집안일부터 서둘렀던 아침. 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았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거실 벽의 시계를 보니 너무 이른 시각의 방문이다. 현관문 밖의 인기척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아침부터 웬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허겁지겁 신발부터 벗고 들어오는 준이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부담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일도 꼬였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갈 정도로 컸고 그해 채용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 재임용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시험 대비를 위해 시간이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이 놀이터는 가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의 조언대로 따를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녀와 멀어졌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팍팍해진 인심에 한몫거든 느낌. 마음에 걸렸다. 여리고 약한 그녀를 대변하지 못하고 외면했다는 마음이 나를 짓눌렀다. 다른 이들이 모르는 진실, 준이네의 속사정을 아는 데도 감싸주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아들 때문에 매일 놀이터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 아들에게 온 신경을 쓰느라 츄리닝에 티셔츠만 입은 엄마. 아들이 노는 근처에서 노심초사 눈이 휑한 준이네. 이런 이유로 이웃들은 준이네를 멀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전부는 아니다. 아주 일부일 뿐. 그들이 모르는 것도 있다. 그녀는 아이의 잘못을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아는 엄마다. 쉬운 일 같아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어 난 그 점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시 놀이터에 갔다. 놀고 있는 준이를 보았다. 혼자 신나게 미끄럼틀 위에서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아이는 이제 준이뿐이다.
“언니, 저 이사 가요. 남편이 발령이 났어요.”
“잘됐네. 축하해!”
떠난다는 예상 밖의 소식을 전하는 그녀를 보고 복잡한 감정들이 일렁거렸다. 잠깐 만난 사이지만 그녀가 내게 준 마음은 진심이었고 나 또한 그랬다. 서운함, 미안함, 아쉬움이 올라왔지만 나는 “축하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녀가 떠난 후 무성하던 소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던 이들의 입도 조용해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떠오르는 얼굴. 놀이터만 가면 “언니!”하고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