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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May 03. 2024

욕심을 내면 힘만 들어

꽃무늬 바지로 일군 텃밭 이야기

  

  목적지는 그날따라 혼잡했다. 변두리 외곽부터 시장 입구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트럭 근처는 구경하는 인파로 이른 시각부터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혹시 오일장인가? 날짜를 헤아려 따져보니 운수 좋게 장날이었다. 좀 더 걸어 도착한 낡고 오래된 가게 앞에는 사람보다 부지런한 모종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게 안을 채우고도 모자라 골목길을 메우고 있었다.


  “이건 호박이고, 저건 틀림없이 토란이야!” 나는 아는 친구를 만나듯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 나를 따라오던 남편이 헷갈린다며 재차 모종의 이름을 물었다. 생선 이름을 내가 혼동하는 것처럼 바닷가에서 자란 그 역시 호박과 오이를 엇갈려 가리킨다. 호박! 토란! 오이! 그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전에 느끼지 못하던 호박이 토란이 그리고 오이가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트에 진열된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 새로운 존재 같았다. 


  가게 앞은 일찍부터 모종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허름한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남편과 나는 청바지를 입고 신이 난 표정이다. 모종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비료 등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어 간판을 보니 의외로 농약사였다. 만물상점처럼 농사에 필요한 것들이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우리가 뻘쭘하게 둘러만 보고 서성거리자 상냥해 보이는 주인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사장님, 상추하고 쑥갓, 그리고 아삭이고추 좀 주세요.”

  “땅이 몇 평 정도 돼요?”

  “소꿉놀이하는 정도입니다.”


  살짝 웃으며 모종을 같이 고르고 키우는 법도 알려주었다. 예상대로 주인은 친절했다. 그리고 입은 옷이 눈에 거슬렀는지 아니면 필요할 것이라고 짐작했는지 넌지시 어느 가게를 일러줬다. 친절하면서 눈치까지 빠르다. 물론 우리는 주인장의 조언에 따라 모자와 몸뻬 등을 샀다. 


  놀이터는 한적한 장소이지만, 그렇다고 전망이 좋은 곳도 아니다. 비좁고 풀만 무성한 시골집 마당이다. 밭 대신 마당을 놀이터로 삼은 우리는 풀부터 뽑느라 심기도 전에 지쳤다. 정작 채소를 키우려면 토질이 중요한 데 우리는 그것을 간과했다. 딱딱하고 메마른 데다, 물 빠짐도 좋지 않아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었다. 할 수 없다며 우선 삽과 쇠스랑부터 가져오는 남편,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던 실력이 전부라 영 미덥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걸까. 쇠스랑을 번쩍 들어 흙을 파기 시작하는데, 딱딱한 땅이 덩어리 채 올라와 소똥처럼 일렬로 떨어졌다. 초보치고는 꽤 제대로 일구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솜씨를 발휘한 걸까. 무딘 땅을 금세 두툼한 밭두렁으로 만들고는 흡족한 듯 자신이 만든 놀이터를 토닥였다. 마치 소꿉놀이에 재미를 붙인 소년 같았다. “바로 이곳에 상추와 고추를 심을 거야!” 


  검은 비닐을 깔면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린 양쪽에서 비닐을 붙잡으며 땅에 옷을 입히듯 씌웠다. 그리고 단추를 채우듯 양쪽 끝에만 흙을 덮었더니 제법 작물을 키우는 모양새며 밭고랑 티가 났다. 비닐에 구멍을 뚫고 귀여운 아기 모종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옮겨 심었다. 뻐근한 허리와 저린 다리를 참으며 모종 심기를 끝냈다. 일을 마친 수고를 서로 칭찬하며 둘러보던 중, 동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자국을 발견했다. 틀림없이 고라니 발자국이다.


  잘 모르던 시절에는 사슴이라고 불렀다. 발 빠르게 펄쩍펄쩍 지나가는 모습만으로도 반가웠고, 밭농사를 망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생김새도 순하다. 그러다가 밭농사를 엉망으로 만든 현장 앞에서 그들의 두 얼굴을 보았다. “몹쓸 것들. 다시 오기만 해봐라!” 밭주인은 한숨과 화를 쏟으며 자신의 밭에 그물망을 빙 둘러쳤다.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우리는 방금 심은 채소를 훔치는 도둑으로 고라니를 몰아세웠다. 의심이 자라더니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우리는 서둘러 기둥을 박고 울타리를 쳤다.


  이런 장면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시장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발자국만 보았을 뿐인데, 마치 우리가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미리 알아챈 것만 같다. 그는 농약사에서 모종을 구경할 때 만난 사람이다. 우리가 이것저것 묻자, 바쁜 주인을 대신해 여러 가지를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초보 시절 심었던 토마토는 먹지도 못하고 전부 버려야 했다며, 모종을 너무 많이 사지 말라고 조언했다. 처음 심는 데다 욕심까지 부리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넉넉한 게 좋다며 있는 대로 담았다가 다시 덜어내고 5개씩만 담았다.


  “먹을 만하면 따먹고, 병이 들어 못 먹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혀.

  “너무 욕심을 내면 힘만 들어.”     


  다시 찾은 놀이터는 풀이 올라오기는 해도 고라니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울타리 노끈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길게 흩날렸다. 울타리 사방에서 나풀거리며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하듯 온종일 펄럭거린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광경이 보면 볼수록 흉측했다. 겁이 많은 고라니라면 틀림없이 기겁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놀이터는 그렇게 바람만 실컷 놀다간 모양이다. 난 조용한 것도 좋지만, 가끔은 그들이 들리는 마당이라야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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