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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Jun 24. 2024

아내 대신 다른 여자 그리는 남편을 응원해요

퇴직한 부부, 낯선 도시에서 각자 그리고 씁니다

   그는 사진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옆에 있는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사진 속으로 간다. 풍성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커다란 눈, 그녀만의 상징이 된 두툼한 입술이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미인이지만 그래도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역시 눈빛이다. '기초 소묘' 수강을 위해 그는 필요한 자료를 챙기기 시작한다. 검은색 화구가방에 4절 스케치북을 넣는데 방이 좁아서 그런지 가방이며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크게 느껴진다. 4B연필과 톰보지우개는 초록색 필통에 담고 '앤젤리나 졸리' 사진을 정성스럽게 넣는다.   

  

 "다음엔 당신 부인을 그리는 건 어때?"

 "강사님이 그러는데 이목구비 뚜렷한 외국인이 그리기 편하대."

 "이왕이면 이쁜 여자가 좋다는 거네."

 "오늘은 졸리와 마지막이야."


  우리는 직장을 같은 날에 그만두었다. 그는 주 근거지인 당진을 그대로 두고 1년 동안 대전살이를 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 나 역시 살아본 적 없는 도시가 궁금했고 배우고 싶은 게 있어 좋다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글쓰기를 그는 그림을 배우기로 했다.      


  "뜬금없이 웬 그림이야?"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

  오래전부터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살아온 시간을 계산해도 나만큼 그와 오래 산 이가 없다. 어쩌면 시부모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때도 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물론이고 답답하면 왜 말이 없는지, 주로 누구랑 술을 먹는지, 올빼미모임의 멤버가 누구인지 등. 대강의 그를 추측하며 아는 척을 했는데 순 착각이었다.     


  조그만 집을 월세로 얻고 제일 가까운 곳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평생교육원이 마침 개강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기초 소묘인 '연필화'를 선택했다. 처음 배울 때는 뭐부터 시작해야 좋으며 수채화와 아크릴화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는 가르치는 업을 벗어나 그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게 된 기분이 어떨까? 그는 살짝 긴장한 눈치다. 설렘 반 걱정 반을 적당하게 섞은 상기된 얼굴이다. 


  처음 시작하는 배움은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아직 실망이 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는 그 자체가 즐거울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비슷한 느낌을 말한 적이 있다. "연필 한번 잡아보지 않았는데. 대단하지 않아!" 스케치북에 '모과'와 '공'의 형체가 드러나면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한 듯 호들갑을 피웠다. 점하나 없이 깨끗한 종이에 연필만으로도 채워지는 기쁨. 그걸 또 자신이 했다는 만족감으로 자화자찬이 대단했다.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긴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지만.     


  평생교육원에 다닌 지 3개월째였을까. 그는 기초 소묘 수강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3시간이나 그렸는데 졸리가 이상해."

 "괜찮은데. 입술이 틀림없는 졸리야."     


  좀 봐달라는 의미인데 화가가 아니라며 일단 거절부터 했다. 속으로는 기분이 좋아 벌써 그림으로 눈이 갔다. 나도 종일 컴퓨터를 뚫어지게 보다가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되면 그에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퉁명스럽게 도와주었다면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인데. 그는 대체로 아픈 곳만 잘도 찾아내 그것도 조목조목 진단해 주었다. 이젠 나도 그렇게 해 줄 순간이 벌어졌다는 것만으로 통쾌했다. 사실 내 그림 실력은 몇 년에 걸쳐 화실에서 놀며 배운 게 전부다. 지금은 그림 몇 점이 남았을 뿐 아예 그만둔 상태다. 그래서 티를 내지 않는데 그는 이상하리만치 나와 내 그림을 좋게 평가한다.    

 

  “눈과 코의 균형만 맞추면 괜찮을 것 같아.” 별것 아닌 지적에도 그는 고심하는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전문가도 아닌 내 조언에 그렇게 귀 기울이는 반응이 싫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으쓱해지는 기분에 신이 난 것 같다. 숨길 수 없는 흡족함이 더해지더니 지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양인들의 특징인 눈을 더 뚜렷하고 크게 그리면 지금보다 나을 것 같고. 오른쪽에 비해 왼쪽 얼굴이 넓으니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살짝 그쪽만 줄여주기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될 거라고 했다. 지우개를 잘만 이용해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며 왼쪽 볼을 스치듯 지웠다. 얼굴 균형을 조금 맞춰주었을 뿐인데 "역시 전문가다워."라는 말이 들렸다. 치켜세우는 남편의 칭찬이 이어질수록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림이 시보다 어렵지 않아?"

  "시작했으니 졸리 그림은 완성해야지."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잘 마무리할 것이다. 시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은 시를 쓰던 사람이다. 나를 만나기 전부터 시를 좋아했고 시를 쓸 때가 제일 즐겁다고 한 사람이다. 시인이라면 책이 더 어울릴 줄 알았고 평생 글만 쓰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졸리에게 빠지더니 뚫어지게 보고 또 몰두해서 그리기만 한다. 서운하다면서 질투 섞인 말을 일부러 하지만 매번 스케치북을 펼치며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내 편견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는 예전부터 하고 싶어 한 마음의 출처를 찾아 5층 교육실로 간다. 눈빛만은 화가 못지않은 자세로 자신의 이젤 앞에 스케치북을 놓는다. "힘들 정도로 애쓰지는 마요. 세상엔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라는 강사의 말이 들린다. 너무 잘 그리려고 애쓰지 말라는 조언이 마음에 든다. 사진 속의 그녀에 대한 예의만은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고혹한 눈빛과 매력적인 입술에 흔적을 남기는 동작을 쉼 없이 이어간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그 꿈을 순간순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닮지 않았다는 시선을 보낸다 해도 오로지 자신이 그린 여인을 흡족하게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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