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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큐 Nov 28. 2023

[5] 붉은 변기와 종이배

잊고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잊고 싶다는 생각은 쉬운데, 잊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잊은 듯 지내다가도, 머리를 감을 때, 잠이 들 때,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때, 문득 떠오른다.


아마 인간의 뇌는 인간이 고통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 변태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붉은 변기를 상상해 본다. 종이에 잊고 싶은 기억을 적고, 종이배를 만들어 변기에 띄우고, 물을 내리면 기억을 지울 수 있다.


변기와 종이는 준비되었다. 종이에 적을 이야기만 생각하면 된다.


잊고 싶은 기억이 많아서 종이는 큰 것으로 준비했다.

 순간 멍해진다. “무엇을 적어야 하지?”


순간은 꽤 길어지기 시작한다. 인간이 고통받길 원하는 뇌는 잊고 싶은 기억을 숨겨버린다.


 무엇을 적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종이배만 접어 변기에 띄워 보았다.


붉은 변기에 반쯤 차있는 물에 띄워진 종이배는 차츰 바닥부터 무거워져 가라앉기 시작한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한 나의 기억력과 무턱대고 종이배부터 접어 띄운 나의 행동을 원망하면서 가라앉는 종이배를 바라본다.


종이배가 다 가라앉도록 변기의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미련만 가득한 변기 안을 바라보다, 문밖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변기의 버튼을 누른다.


 이번 나의 상상도 하나의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나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변기의 물을 내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헛기침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뇌가 만든 또 하나의 허상이었다. 아무것도 적지 못한 손을 씻으면서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잊고 싶은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


이런. 다음은 변기 말고 세면대에 떠내려 보내는 상상을 해야겠다.


결국 잊고 싶은 기억을 하나 더 만든 상상이었지만, 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마 잊고 싶은 기억을 세면대에 떠내려 보내는 상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잊고 싶은 순간은 그렇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인간이 고통받길 원하는 뇌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붉은변기와 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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