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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령 Mar 01. 2022

낭만이 죽은 시대

고찰 여덟, 낭만과 로망에 대하여

우리는 낭만이 죽은 시대에서 살아.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 설명하기 전, 낭만과 로망이 무엇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자고로 낭만이란 현실적 기준으로부터 동떨어져 자신의 마음을 기준 삼아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이자 그렇게 바라본 세상이다. 낭만과 더불어 ‘로망’은 낭만적인 꿈, 혹은 목표라 생각한다. 목표라 부르기 부끄러운 소망도 낭만의 명 아래 꼭 이뤄내야만 하는 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낭만과 로망은 남들이 보기엔 아깝고, 비합리적이고, 손해를 무릅쓰는 일로 보이기 일쑤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사랑과도 유사점이 많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단어 모두 같은 단어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낭만’은 서양의 “Romance”라는 단어를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가 번역을 할 때 음이 맞는 한자를 가져다 쓴 것이 시초이며 로망은 같은 뜻의 프랑스 단어이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낭만이 죽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보겠다. 첫 번째는 수많은 선택지에 의한 피로감이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제공되고 수많은 선택지가 존재하는 오늘, 지긋이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고 사랑하여 뚝심 있게 사랑하는 낭만적인 감정은 살아남기 어렵다. 영화를 예시로 들어보자. 극장에서 상영 중인 대여섯 개의 영화 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과,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왓챠 등의 OTT에서 제공하는 수천만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 OTT에서 영화 하나를 보아도 본인은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단 하나를 보게 되는 것이기에 별다른 성취감이 없다. 심지어 같은 영화를 재 시청할 경우, 다른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신을 옥죄여 온다. 영화가 아닌 배달음식만 해도 그렇다. 이전에는 책자 하나를 솎아내면 단골집을 정하기가 그렇게 쉬웠다. 가게에 정도 붙여 음식점이 이사를 가거나 사라지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배달대행 어플의 선택지들 사이에서 기억에 남는 가게는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숫자가 되어버린 세상 안에서 뭉클한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진다.


다음은 우연의 결핍이다. 최첨단 기술은 언제나 높은 효율을 지향한다. 그 높은 효율 안에서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채택하고, 사용자에게 추천한다. 이전에는 비디오 가게, 앨범 가게, 식당에서 우연히 끌리는 대상에 도전하여 운명적인 만남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어딜 가나 추천 시스템이 질척이며 들러붙는다. 특히 음악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고등학생 시절, 중고 LP판 및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가게를 한창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앨범 아트, 제목, 가수에 끌려 노래를 들어보고 곡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한 방문을 멈추고 음악 어플을 사용한다. 늘 노래를 추천받아 기쁘게 듣긴 하지만 옛날과 같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또 이전에는 가끔 동명의 곡이나 유사한 영화 제목을 보고 잘못 구매한 경우가 생기면 그냥 감상을 해보고 정을 붙이기도 했는데, 요새는 통 그럴 일이 없다.


세 번째는 인내의 고갈이다. 정보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우리의 인내심도 빠르게 고갈된다. 편지를 몇 주씩 기다릴 수 있었다면 이메일은 며칠로, 문자 메시지는 몇 시간으로 기다릴 수 있는 주기가 짧아진다. 이러한 감정들은 곧이곧대로 일상으로 녹아들어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인내를 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낭만이란 것이 싹트기도 전에 마음의 밭을 헤집어버리는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리며 돌이켜보면 자란 것이 낭만이구나 하는 옛 마음은 이미 꺾인 지 오래다. 타인에 대한 인내에서 정이 남고, 정으로 쌓아 올린 우정과 사랑, 낭만은 참으로 귀해졌구나 싶다. 어릴 적, 아직 VHS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던 시절, 동생과 나는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며 영화를 빌릴 수 있는 선택 권한을 가졌다. 한 번은 나의 차례 때 동생이 비디오 가게에서 때를 쓰며 꼭 영화를 빌리고 싶다고 억장을 낸 적이 있다. 당시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신 기억이 나는데, 오늘날에는 그런 일들이 잘 없는 것 같다.


마지막은 개인의 공간의 확장으로 인한 타인과의 접촉 저하다. 각자의 개성과 특성이 존중받는 오늘, 개인의 자유와 공간이 확장됨으로 인해 타인과 공유되는 공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어딘가 느껴지는 이 쓸쓸함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기엔 마음이 아프다. 더불어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정보 습득 장보가 달라진 바도 크다. 이전에는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선 정보가 제공되는 큰 공공의 장소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옛날 티브이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 마을에 한 대 있는 티브이를 보기 위해 이장님 댁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 대학 합격자 발표를 대자보로 발표하거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타인과 접촉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이름 모를 타인의 친절을 접하고 인연이 시작되기도 했으리라. 사람과 사람이 닿는 곳에선 감정이 이어지고, 낭만이 반짝이기 마련이다.


낭만이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 수고스러움과 번거로움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 있는 법이다. 앞서 말했듯 비효율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비용도 더 들고, 손해도 봐야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가끔은 손에 익었던 불편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왜곡된 기억이라  수도 있겠다만 어릴  석양은   따스하고 었다. 신발 가방을 쫄래쫄래 흔들 친구와 더위사냥 나눠먹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는 누구와도 친구가   있었다.  전화로 친구 집에 전화를 걸면 친구의 가족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었고, 여름휴가를 떠나 기차를 타면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실은 간식 카트가 돌돌돌 지나가곤 다.


몇 달 에는 88 올림픽이 개최된 배경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봤다. 하나 되어  세계에 우리나라를 알리겠다고 악을 썼던  메아리가  가슴 벅차더라. 2002 월드컵  붉은 티를 입고 다 같이 응원을 하던 그때도 그렇다. 지금도 국가대표를 응원하는 마음은 같겠다만, 같은 공간에서 뛰며 소리를 지르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이가 들며 특정 주파수의 소리가 들리지 않듯, 필자도 특정 주파수의 낭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로 낭만이 죽어버린 시대라면 그것 또한 너무 비극적이지 않는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도 그 온기 속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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