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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령 Mar 02. 2022

힘 빼는 문화

고찰 아홉, 지친 우리들의 문화에 대하여

필자가 기억하는 2000년대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 시절 모두는 강압적인 분위기 아래 조금 더 쉽게 단합이 되곤 했다. 단체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일상다반사였다. 당시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선생들의 본보기용 폭언과 폭력 등 다양한 불합리함 또한 유야무야 넘어가곤 했으며 그에 의문을 품어본 적도 딱히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어른들의 삶은 더했으리라. 이러한 불합리함 속에서 늘 강조되던 단골 소재에는 정신력, 노력, 근성 등이 있었다. 필자는 이를 ‘힘내는 문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요즘은 그 옛날과는 다르게 ‘힘내는 문화’보단 ‘힘 빼는 문화’가 우세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비해 유행하는 음악이나 패션 모두 이전보다 여유로워진 느낌이 난다. 패션의 경우 장식이 많고 몸에 밀착된 형태에서 조금 더 루즈하고 오버핏한 실루엣으로 유행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청바지도 2000년대 초중반의 디테일이 많고, 찢어지고 밑위가 짧던 바지로부터 2010년대의 스키니진을 거쳐 2020년대의 와이드 핏이 유행을 하고 있지 않는가? 운동복을 패션으로 하는 애스레져 룩의 등장 또한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음악 또한 하나의 장르로 한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여유로운 느낌이 커졌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초중반의 펑크록, 2010년대 초반의 EDM과 dubstep을 거쳐 후반에는 힙합이 주로 유행했다. 기존의 힙합과는 다른 형태로 옛 곡을 샘플링하여 새로운 형태로 녹여내는가 하면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뭉개어 멈블링(Mumbling)을 한 노래들이 유행하기도 했다.


광고나 방송의 경우는 어떨까? 박카스 등의 꾸준히 인기 있는 제품들의 광고도 이전에는 하루하루를 힘내자!라는 모토에서 스스로를 잘 챙기고 힘내자라는 조금은 수동적인 내용으로 변경되었다. 예능도 여러 사람이 모여 공통 과제를 달성하거나, 음악과 요리 등을 주제로 한 경쟁 프로로부터 타인의 삶 엿보기, 맛집 탐방하기 등의 예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누군가 직접 나서 도전을 하는 것조차 지켜보기엔 지쳐버린 걸까… 심지어 남의 집에서 갑작스럽게 식사를 하는 방송이나 냉장고를 스튜디오까지 옮겨 열어보는 방송까지 생겼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직 경쟁하는 방송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타인을 관찰하는 식의 방송이 늘어나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나는 방송만 해도 “나 혼자 산다”, “나는 자연인이다”, “정글의 법칙”, “전지적 참견 시점”, “미운 우리 새끼”, “냉장고를 부탁해”, “한 끼줍쇼” 등이 있겠다.


마지막 예시로는 만화를 들고 싶다. 시대별로 유행한 소년만화를 보면 그 시대를 자라온 소년들 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의 성장 소년만화 드래곤볼을 지나 슬램덩크, 유유백서 모두 주인공이 고통을 겪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00년대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또한 초창기에는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의 모습과 2010년대 주로 유행한 만화들의 모습은 전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이때는 선천적인 능력이나 노력 없이 우연히 주어진 사기적인 능력으로 모든 난관을 어려움 없이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작품이 인기를 많이 끌었다. 설령 노력을 한 설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모습은 생략되어서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일본의 이러한 분위기는 국내 웹툰에도 자연스럽게 젖어 들어 요즘도 이런 스토리라인을 따르는 작품들이 매우 많다. 이렇게 시청자 및 독자들을 수동적인 위치에 놓는 것 또한 힘 빼는 문화의 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비록 불합리함 속에서였지만 다 같이 모여 파이팅을 외치던 우리들은 언제 이렇게 지쳐버린 걸까… 오늘도 힘내고, 내일도 힘내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결과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서였을까? 아니면 노력의 정도뿐만이 아닌 방향의 중요성을 깨달아서일까? 어쩌면 무조건 참으며 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서일지도 모른다. 요즘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가깝다고 느꼈던 과거가 이젠 멀리도 지나갔구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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