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살거나, 바쁘게 죽거나(9/10)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한국 제목을 정말 싫어한다.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를 극히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원제의 Redemption, 즉 구원은 영화 안에서 2가지 의미를 가진다. 표면적으로는 석방 혹은 외부 세계로의 탈출이고, 내면적으로는 삶의 구원 자체를 의미한다. 이 영화를 감옥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삶을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제시하여 시청자들에게도 구원을 내려주는 동아줄이다.
잘 나가던 은행가 앤디 듀프레인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감금된다. 그 내부에서 앤디는 낙담하기보단 나름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취미를 찾는다. 또 우연한 계기로 은행가였던 경력을 살려 간수들과 교도소 소장의 세금을 관리해주며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추가로 소장의 검은돈을 세탁하며 간수들로부터 특별취급을 받던 그는 교도소의 도서관을 확장시키고 체계화시키기까지 한다. 다른 죄수들의 검정고시 시험을 도우며 타인을 돕는 행위에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국 탈옥에 시도해 성공하고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중에는 교도소에서 친한 친구였던 레드와 재회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가 명작으로 꾸준히 추천되는 데는 탈출에 대한 카타르시스 하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대사와 연출이 너무 좋다. 대사 하나하나가 캐릭터성을 너무도 잘 표현해낸다. 그 예시로 처음 앤디가 입소하는 날의 장면이 있다. 소장이 독실한 기독교 컨셉을 내세우며 지켜야 할 수칙을 알려주는데 욕설은 금지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폭언을 내뱉으며 자신은 규칙의 예외로 두는 면모를 보인다. 인상적인 연출로는 앤디가 탈출한 다음 날, 소장이 자신의 신발 대신 앤디의 낡은 작업화가 담긴 신발 상자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미국의 오래된 속담인 “Put your feet in my shoes” 즉,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을 시각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해 낸 점이 유쾌해서 좋았다.
오락성 외에도 연출이 뛰어난 영화이니 장점은 여기까지 하고 메시지에 대해 말해보겠다. 영화의 죄수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밖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룹과 교도소의 삶을 자신의 삶 전체로 규정짓고 그저 시간을 때울 뿐인 그룹이 그렇다. 브룩스와 레드라는 두 인물은 후자에 속하는데, 이들은 희망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브룩수는 석방 후,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친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고통받다 자결한다. 레드 또한 같은 길을 갈 뻔했으나, 앤디로부터 구원을 받아 생각을 바꿔 새로운 삶을 찾는다.
구원에 대한 메시지는 영화 전체적으로 깔려있다. 소장이 앤디에게 성경을 돌려주며 “구원은 내부로부터 온다”는 대사, 앤디의 “바쁘게 살거나, 바쁘게 죽거나”라는 대사, 앤디가 LP판의 음악을 교도소 전체에 울리게 한 뒤 음악에 대한 아름다움과 희망을 논하는 장면 등등… 교도소 자체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이 죄수들이라면 매일매일 종강과 퇴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영화에서 석방을 기다리며 시간을 그저 죽이는 죄수들과 다를 바 없다. 쇼생크 리댐션은 이러한 감옥의 삶을 타파하고 스스로를 구원시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끝은 앤디가 탈옥을 하는 장면이 아닌 레드가 앤디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시키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희망을 가슴에 품고 그를 만나는 장면인 것이다.
앤디도 그의 무죄가 밝혀진 이후, 석방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에도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영화는 앤디를 어딘가 특이한 사람으로 묘사는 하지만 월등한 초인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폭행도 당하고 권력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런 선택은 누구든지 앤디에 몰입하여 스스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초인과 관객의 투영체, 그 애매한 선을 타며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와 메시지 두 매력을 다 느낄 수 있기에 이 영화가 명작이라고 생각한다.